영국이 떠난 유럽연합(EU)의 ‘양대 기둥’ 인 독일과 프랑스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독일 라인 강변의 유서 깊은 도시 쾰른까지는 고속철로 6시간 정도면 닿는다(약 535㎞ 거리).
그런데 5월 26~28일(이하 현지시각) 이뤄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프랑스 국가원수 자격으로는 2000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 이후 무려 24년 만이었다(EU 관련 외교정책 조율 등을 위해 베를린을 종종 방문하긴 했다). 그만큼 두 나라 관계가 껄끄러웠다는 이야기도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지난해 국가별 경제 규모(GDP) 순위에서 독일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3위였고, 프랑스는 일본, 인도, 영국에 이은 7위였다. 그런 두 나라의 협력이 원활하게 이뤄질 경우 EU 경제는 성장을 위해 한층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우선 마크롱과 숄츠 두 정상의 리더십 스타일부터 극과 극으로 다르다. 미국에 대한 안보·국방 의존도를 줄이자는 이른바 ‘유럽 공동 방위론’을 앞세운 마크롱은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온 반면 숄츠는 존재감이 부족해 ‘투명 인간’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에너지 정책과 유럽 안보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입장 차도 컸다. 친원전 국가인 프랑스는 “원전을 활용해 생산된 ‘핑크 수소’는 청정 수소”라는 입장이지만, 탈원전 국가인 독일은 동의하지 않는다.
"변화에 맞서지 않으면 필멸의 위기 처할 것"
유럽의 안보를 놓고도 양국은 이견을 보였다. 자체 핵무기를 갖춘 프랑스는 유럽의 안보 독립을 추진하자는 입장인데, 최근 독일이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하며 미국산 장비를 구매하기로 한 결정에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양국 간 껄끄러운 관계 탓에 EU 의사 결정이 더뎌지고 격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한 대응 능력도 떨어져 EU 전체의 힘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EU의 힘은 회원국이 ‘공통의 질서’를 추구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관철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 자격으로 24년 만에 독일행을 결심한 것은 역내에서 눈에 띄게 약진하고 있는 극우 세력의 기세를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중국이 저가 덤핑 공세로 전기차 등 전 세계 시장을 흔들고, 미국이 보조금 살포를 통해 반도체 공급망 통제에 나선 상황에서 유럽도 달라져야 한다는 절박함도 컸다.
양국 정상은 5월 27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공동 명의로 ‘우리는 유럽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둘은 기고문에서 “유럽이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의 침략 전쟁, 지정학적 변화 등과 맞물려 중대한 변화의 시기에 직면해 있으며 도전에 맞서지 않으면 필멸의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친환경과 디지털 전환의 영역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회복력을 높이는 것이 도전에 대응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산업 정책을 통해 인공지능(AI), 양자 기술, 우주, 5G·6G(5세대·6세대) 이동통신, 생명공학, 넷제로 기술, 모빌리티, 화학 등 미래 핵심 기술의 개발과 출시를 지원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 같은 변화를 이룰 일종의 방법론으로 ‘자본시장동맹(Capital Markets Union)’을 공론화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자본시장동맹은 유럽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강력한 단일 자본시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속에 2015년 처음 논의됐지만 회원국 간 이견으로 중단된 바 있다. 2015년 9월 30일, 당시 EU 금융 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이었던 조너선 힐은 자본시장동맹 계획의 출범을 알렸다. 여기에는 EU가 추진하기로 한 자본시장동맹은 주식이나 회사채 발행 등 자본시장을 통한 기업의 직접금융을 활성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동안 자본시장동맹은 잘 진행되는 듯했다. 많은 유동성이 국경을 넘어 움직였다. 하지만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결정이 거대한 걸림돌이 됐다. 런던은 유럽에 있는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EU 내 자본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가 확정되면서 자본시장동맹을 이끌었던 힐도 2016년 EU 집행위원회에서 물러났다.
유럽 기업들은 자금 조달의 상당 부분을 은행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채권시장이 기업 자금 조달 창구의 4분의 3 정도를 담당하고 있다. 은행 대출은 나머지 4분의 1 정도만 담당할 뿐이다. 그런데 EU로 오면 이 비율은 정확히 정반대가 된다.
유럽에서 은행의 역할이 큰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라인란트(Rheinland) 모델에서 은행은 기업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기업의 지분을 직접 보유하기도 했다. 라인란트 모델은 라인강이 흐르는 독일·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같은 서유럽 국가의 사회·경제정책을 일컫는다. 성장보다는 복지를 추구하고, 경쟁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이 라인란트 모델의 대표적인 정책 방향이다.
프랑스, S&P 신용등급 강등 수모
그런데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라인란트 모델의 취약점이 드러났다.
EU 내 기업들이 조달한 총자금 규모는 2006년 EU 국내총생산(GDP)의 112%에서 2016년에는 106% 수준으로 줄어든 것. 은행 대출이 5분의 1이나 줄어든 것이 컸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각국 은행들은 그들의 대차대조표를 회복하고, 부채를 줄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은행 산업에 대한 규제는 더욱 엄격해졌고, 은행들의 자본 건전성을 파악할 수 있는 BIS(국제결제은행) 비율 규제도 강화됐다. 미국에서는 은행의 대출이 줄어도 기업은 주식이나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은행 대출에 의존하는 유럽에서는 은행이 대출을 줄이자 기업의 자금 조달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 같은 차이로 인해 미국은 유럽보다 더빠르고 강하게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유럽은 투자 부진으로 AI를 비롯한 첨단기술에서 미국과 중국에 밀리게 됐다.
마크롱의 이번 독일 방문은 3년째 이어지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유럽의 재정이 눈에 띄게 악화되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비용은 하루 평균 1억3600만달러(약 1878억원)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재정 적자 대부분을 미국과 EU가 대신 메워 주고 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최소 방위비 기준을 ‘GDP 대비 3%’로 선언해 유럽 재정 위기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에 맞서 경제협력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에는 EU 내부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 장관과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 장관, 아돌포 우르소 이탈리아 산업 장관은 앞서 4월 8일 파리 인근 뫼동에서 3자 회의를 열고 “유럽이 이빨을 드러내야 한다”며 AI, 반도체 등유럽의 첨단 기술 개발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 두 나라 모두 극우 정당이 약진하고 있어 두 나라의 리더십이 EU 회원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프랑스는 5월 31일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국가 신용 등급을 ‘AA’에서 ‘AA-’로 11년 만에 강등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재정 적자가 2027년에도 GDP의 3%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탈리아 라디오 인터뷰서 “이제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따르는 게 아니라 앞장서고 있다”며 “이탈리아인이 돕는다면, 우리는 유럽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