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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우 나노 회장케임브리지대 이학 박사, 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현 한양대 총동문회장
신동우 나노 회장
케임브리지대 이학 박사, 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현 한양대 총동문회장

모든 인생은 예외 없이 시련을 겪는다. 실패와 사고, 질병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명예와 부(富)의 추락으로 모욕과 수치,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삶의 어느 순간에 찾아온 이런 고난은 교만의 씨앗이 자라서 겸손의 방패를 훌쩍 넘어 찾아오기도 하지만, 딱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바다의 파도처럼 그저 수시로 밀물처럼 밀려오며, 시계추처럼 고난과 평안이 반복되며 시간이 흘러 늙어간다.

실패해 울고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하늘에 있는 수많은 천사보다는 이 땅에서 온갖 고난을 견디며 살아온 한 명의 인간이 더 나을 수 있다. 원인을 모르는 시련으로 단련된 인간은 울고 있는 아이의 슬픔을 더 깊게 바라본다. 지독한 고난을 겪은 사람일수록 가족, 친구, 동료의 고난을 더 귀담아듣고 더 오랜 시간 동행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고난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가는 매우 중요한 학습 과정이다.

중앙선을 넘은 음주 운전자의 차량에 착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어머니는 세상 밑바닥에 떨어진 절망을 겪는다. 이 어머니가 말없이 내밀어주는 손은 고난의 고통 속에 헤매는 또 다른 인생에 슬픔을 견디는 힘을 준다. 그렇기에 어떤 고난도 쓸모가 있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장녀가 1960년대 미국에 유학 시 유난히 친절한 한 미국 부부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부부의 외동아들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참전 용사였다. 아들이 생전에 쓰던 방에서 한국 땅에 묻힌 앳된 청년의 사진을 보며 김 교수의 장녀는 이 부부의 품에 안겨 같이 울었다고 한다. 이 미국인 부부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한국인과 한국 발전을 염원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의 고난과 시련의 눈물이 강이 되어 역사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이 꼭 들려주고 싶은 지혜를 물어왔다. “내게 악한 영향을 끼칠 사람과는 처음부터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지혜다.” 그리고 덧붙였다. “똑똑한 사람보다는 의로운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좋다.” 쉽지 않다. 그러나 훈련해야 한다. 고난은 영광의 섭리를 품고 있다. 고난을 교훈으로 여기면 영광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더 큰 고난이 찾아와 결국 무너진다.

수년간 고난을 겪은 후 서른 중반에 남해 바닷가 소도시에 있는 대학에서 근무하게 됐다. 낯설었다. 희망이 멀어 보였다. 그러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두 아이에게는 가까운 산과 바다와 강이 천국 같은 놀이터였다. 강가의 작은 아파트를 걸어 나와서 달밤에 손잡고 강 건너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별 총총 하늘 아래서 강변을 뛰어놀던 행복은 우리 가족의 가장 소중한 인생 추억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기간에 지방 대학 졸업생의 취업을 해결하기 위해서 학부 학생 네 명과 대학 실험실에서 창업을 했다. 대학 내 작은 실험실에서 시작해 인근의 농공단지를 거쳐 제법 규모를 갖춰 고향으로 공장을 옮겼다. 지난 25년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성장해 국내외 시장에서 제 몫을 하고 있다. 중국에 원료 공장을 건설하고, 스페인에 소재 공장을 세웠다. 국내 다른 산업도시로도 공장을 넓혔다. 시련에 부딪혀 깜깜할 때면 어차피 빈손으로 출발했으니 망해도 밑질 것은 없다고 혼자 다짐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취약한 산업은 원료 산업이다. 국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원료와 소재 산업을 이 분야를 제대로 공부한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청춘을 내게 맡겨준 청년들의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쫓기듯 내려온 남해 도시에서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상의 공기를 맑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원료와 소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모든 것은 시련에서 시작됐다. 그 시련 때문에 소외된 청년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나를 믿고 청춘을 맡긴 인생을 보람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시련에 맞붙는 맷집을 키웠다. 돌이켜 보니 고난이 지독할수록 강하게 붙어있던 교만이 떨어지고 겸손과 관대함이 찾아왔다. 인생과 기업에 고난의 끝은 없다. 고난은 살아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