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당시 곤잘레스 국제무역센터 소장이 118개 WTO 회원국이 서명한 무역과 성평등에 관한 공동 선언문을 들고 있다. 이 선언문은 여성의 국제무역 참여를 증가시키고,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우며 그 과정에서 여성이 직면하는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사진 WTO 유튜브
2017년 12월 당시 곤잘레스 국제무역센터 소장이 118개 WTO 회원국이 서명한 무역과 성평등에 관한 공동 선언문을 들고 있다. 이 선언문은 여성의 국제무역 참여를 증가시키고,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우며 그 과정에서 여성이 직면하는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사진 WTO 유튜브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 전 세계에서 10억 명의 여성이 경제활동에서 배제돼 있습니다. 둘째, 이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가한다면 세계는 25조달러(약 3경4523조원) 더 부유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전 세계 수출 기업 5개 중 1개만이 여성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11일 오후 제11차 WTO(세계무역기구) 통상 장관 회의가 열리고 있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자회견장에는 훗날 스페인의 외교 장관이 된 아란차 곤살레스 국제무역센터(ITC) 소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968년에 설립된 국제무역센터는 WTO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공동 산하기관으로 개도국에 대한 무역 관련 기술 지원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다. 그는 “이미 47%의 특혜무역협정이 성평등 조항을 반영하는 등 세계 여러 나라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라며 “우리는 실용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다수의 회원국이 서명한 이 공동 선언문을 주목해 달라”라고 강조했다.

2017년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이 20조달러(약 2경7618조원)에 근접하는 가운데, 미국 경제 규모보다 25%나 더 큰 경제적 부가 매년 여성의 경제활동 배제로 창출되지 못해 무역에서 여성의 역할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곤살레스의 기조 발언은 청중과 기자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당시 WTO 사무총장도 제일 바쁜 회의 이틀째 날임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에 참석, 무역과 성평등(Trade and Gender) 이슈를 WTO 공식 의제로 제기하게 된 의미를 강조하는 등 해당 의제에 힘을 실어줬다.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 서울대 경제학 학·석·박사, 옥스퍼드대 명예펠로, 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
서울대 경제학 학·석·박사, 옥스퍼드대 명예펠로, 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새로운 이슈인 무역과 성평등,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

성평등 이슈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오늘에 와서 교육과 건강 분야에서 성평등은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기회 분야에서 아직 성차별이 끈질기게 남아 있는 가운데, 특히 무역에서 성평등 이슈가 제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세계화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면서 통상 정책의 효능감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됐다. 특히 통상 정책이 국가의 부(富)를 증가시키는 데는 기여할 수 있지만, 그 부를 적절히 분배하는 내적 메커니즘이 부재하다는 비판이 고조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다른 국제 연구 기관은 통상 정책의 영향이 개인에게 미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면서 경제적 약자 그룹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그중 대표적인 집단이 여성이었다. 무역과 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통상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무역이 성평등 관점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교역 분야가 비교역 분야에 비해서 경쟁에 더 많이 노출됨에 따라 수익을 더 많이 창출하는 더 효율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도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역이 필요하다는 무역과 개발(trade and development)의 핵심적 논리에 해당하는 주장이다. 결국 경제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무역을 더 많이 하는 것이 필요한데, 여성이 구조적으로 무역에서 배제되고 있어서 경제 발전이 더딘 것인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세 가지 정체성으로 파악되는 여성, 모두 무역 비친화적

무역과 관련해 여성은 크게 세 가지 정체성을 갖고 있다. 무역업에 종사하는 피고용인, 교역된 상품과 서비스 소비자 그리고 사업 및 무역의 주체로서 여성 기업가가 그것이다. 

먼저 피고용인으로서 여성을 보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수출 기업에서 여성의 고용 비율은 일반 기업에서의 고용 비율보다 더 낮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5년 전체 고용에서 여성 고용은 42.1%인 데 반해 수출 지원 고용 분야에서는 34.6%에 불과했다. OECD 전체로 볼 때도 각각 45.2%와 38.6%로서, 수출 관련 분야에서 여성 비중이 6.6%포인트 더 낮았다. 수출 기업에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더 높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여성의 평균 임금 수준이 낮아지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여성은 상품과 서비스 소비자로서도 중요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무역 자유화를 통한 수입재 가격 하락과 상품 다양성의 증가는 여성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준다. 저소득 계층군에 더 많은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니 집안의 경제력은 다 여성이 쥐고 있고, 쇼핑은 여성이 다 하는데 무슨 말이냐’고 의아해할 수 있으나, 전 세계 평균적으로 볼 때 저소득 집단에 상대적으로 여성 비율이 더 높은 것이 현실이다. 결국 현재의 경제 안보와 공급망 재조정 흐름은 무역 비용을 늘려 여성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여성이 주도하는 기업은 남성 주도 기업보다 무역 활동이 덜 활발하다. 여성 주도 기업은 일반적으로 남성 주도 기업보다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더 작고, 설립 연수도 짧고, 자금 조달에 더 어려움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여성 기업가가 사업하는 데 겪는 장애물로는 신용 및 자금 조달 어려움, 가사 등 무급 노동으로 인해 사업에 전념할 시간 부족, 빈약한 전문 네트워크 그리고 기업가 정신과 경험 부족 등이 거론되고 있다. 여성은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에 더 많은데, 제조업이 서비스업보다 더 무역 친화적이라는 일반적인 특성을 고려할 때 여성은 무역에 관한 한 남성보다 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비스 부문에서도 여성은 교육, 보건, 공공 행정 및 개인 서비스 같은 비교역적 특성이 강한 서비스업에 몰려 있는데 이러한 특징이 여성을 무역과 멀어지게 한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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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과 성평등, 더 적극적인 정책 개발과 정용이 필요한 시점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 무역에서 성평등을 증진하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무역에서 여성 참여가 더 확대되는 것이 경제성장에 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통상 정책과 국내 정책 분야에서 더 많은 고려가 필요하다.

우선 여성 관련 무역 통계를 더욱 정밀하게 구축해야 한다. 성평등 관점에서 통상 정책의 영향을 다양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통관 절차를 간소화, 투명화하는 무역 원활화 조치는 여성 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이크로중소기업(MSME)에 특히 중요하다. 통상 절차의 디지털화는 여성 기업가를 보호하고 통관 시간 단축은 돌봄 책임으로 시간 부족에 허덕이는 여성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 서비스 교역의 활성화는 서비스업에 더 특화된 여성 기업을 무역으로 이끌 것이다. 아울러 여성의 금융 접근성 증진, 여성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참여 확대, 네트워킹 기회 확대 등 국내 정책 영역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제회의에 가면 쏟아져 나오는 무역과 성평등 의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