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이 아무리 강해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 고대 중국의 병법서인 ‘손자병법’은 강한 적과 싸울 때 제1계는 기만전술이라고 했다. 손자는 어쩌면 숲의 곤충에게서 병법을 배웠을지 모른다.

딱정벌레는 박쥐가 싫어하는 소리로 위장하고, 나방은 박쥐가 먹이를 찾는 소리를 흡수해 숨는다. 나비 애벌레는 대담하게 개미굴로 들어가 여왕의 소리로 위장하고 호의호식한다. 적군의 통신을 교란하는 곤충계의 해커들이다.

1 박쥐가 나타나면 초음파 경고음을 내는 길앞잡이. 사진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
1 박쥐가 나타나면 초음파 경고음을 내는 길앞잡이. 사진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

독나방 초음파 소리로 위장하는 길앞잡이

미국 보이시주립대의 제시 바버(Jesse Barber) 교수와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의 할란 고프(Harlan Gough) 박사 연구진은 5월 14일(이하 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밤에 활동하는 길앞잡이가 초음파를 내는 것은 천적인 박쥐가 싫어하는 먹이인 독나방으로 위장하려는 행동임을 확인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길앞잡이는 다른 곤충을 잡아먹는 포식성 곤충이다. 사람이 다가가면 아주 멀리도 아니고 쫓아가기 딱 알맞을 만큼만 날아간다. 그 모습이 길을 안내하는 것 같다고 길앞잡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영어로는 무시무시하게 ‘호랑이 딱정벌레(tiger beetle)’로 불린다. 워낙 빠르고 공격적인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

2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의 할란 고프 박사가 박쥐 초음파 소리를 들려주자 길앞잡이는 겉 날개와 속 날개를 부딪혀 초음파를 냈다. 이 초음파는 박쥐가 싫어하는 독나방이 내는 것과 비슷했다. 사진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
2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의 할란 고프 박사가 박쥐 초음파 소리를 들려주자 길앞잡이는 겉 날개와 속 날개를 부딪혀 초음파를 냈다. 이 초음파는 박쥐가 싫어하는 독나방이 내는 것과 비슷했다. 사진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

연구진은 애리조나주 남부 사막에서 길앞잡이 20종을 붙잡아 연구했다. 이 중 7종은 밤에 날아다니다가 박쥐가 나타나면 초음파를 냈다. 길앞잡이가 딱딱한 겉 날개를 뒤로 비스듬히 올리면 부드러운 속 날개 뒷부분과 부딪혀 두 손으로 손뼉 치듯 초음파가 발생했다.

박쥐는 자신이 낸 초음파가 물체에 부딪혔다가 돌아오는 반사파를 감지해 위치를 파악한다. 메아리로 길을 잡는, 이른바 반향정위(反響定位·echolocation)다. 다른 곤충은 박쥐 초음파의 파장을 감지하면 바로 숨는데, 길앞잡이는 대범하게 여기 있다고 알리듯 초음파를 낸 셈이다.

연구진은 길앞잡이가 초음파를 내는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박쥐가 반사파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통신 방해일 수 있다. 하지만 길앞잡이가 내는 초음파는 단순해서 박쥐가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할 가능성은 없었다.

대신 연구진은 나방이 내는 초음파에 주목했다. 독나방은 자신이 위험하다고 알리려고 박쥐에게 초음파를 보낸다. 독개구리가 뱀의 눈에 잘 띄는 화려한 색을 가진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런데 일부 나방이 독나방의 초음파 신호를 모방했다. 그러면 맛있는 먹이임에도 박쥐가 피했다. 연구진은 이런 나방과 길앞잡이의 초음파를 비교해 겹치는 부분을 발견했다. 길앞잡이도 독나방으로 위장하기 위해 박쥐에게 초음파를 보낸 것이다.

3 황제산누에나방은 박쥐가 먹이를 찾으려고 내는 초음파를 흡수해 자기 위치를 숨긴다. 나방의 날개 비늘을 알루미늄 판에 붙였더니 소리 에너지의 87%를 흡수했다. 사진 영국 브리스톨대
3 황제산누에나방은 박쥐가 먹이를 찾으려고 내는 초음파를 흡수해 자기 위치를 숨긴다. 나방의 날개 비늘을 알루미늄 판에 붙였더니 소리 에너지의 87%를 흡수했다. 사진 영국 브리스톨대

박쥐 초음파 흡수해 위치 숨기는 나방

나방은 박쥐가 내는 초음파를 아예 흡수해 자기 위치를 숨길 수 있다. 영국 브리스톨대의 마크 홀더라이드(Marc Holderied) 교수 연구진은 2018년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황제산누에나방이 날개에 있는 비늘로 박쥐가 내는 초음파를 흡수해 위치가 노출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현미경 관찰 결과 나방의 날개에 있는 비늘은 마루와 골이 격자로 나 있는 구조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컴퓨터에서 비늘 구조를 3D(입체)로 재현했다. 비늘은 초음파를 받으면 진동했다. 소리굽쇠를 두드리면 떨어져 있던 소리굽쇠도 같이 떨리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비늘은 초음파 에너지를 50%까지 흡수했다.

나방의 위장 무기는 또 있다. 연구진은 5월 6일 미국음향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황제산누에나방과 같은 과(科)에 속하는 프로메테우스누에나방과 마다가스카르과녁나방이 가슴에 있는 털의 이용해 박쥐가 내는 초음파를 흡수한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연구진은 털들 구멍이 송송 뚫린 흡음재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나방의 초음파 흡수 능력을 소음 방지 벽지로 응용할 수 있다. 홀더라이드 교수 연구진은 2022년 나방 날개는 단단한 표면에서 소리 에너지를 87%까지 흡수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소리의 주파수나 진행 방향에도 상관없었다. 연구진은 나방 날개 비늘을 모방한 초박막 흡음판은 얇고 가벼워 건물이나 자동차나 비행기, 기차에서 무게를 늘리지 않고 소음을 차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4 개미굴에서 일개미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부전나비 애벌레(분홍색). 여왕개미가 내는 소리를 흉내 낸다. 사진 일본 규슈대
4 개미굴에서 일개미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부전나비 애벌레(분홍색). 여왕개미가 내는 소리를 흉내 낸다. 사진 일본 규슈대

여왕개미 흉내로 개미굴서 사는 애벌레

개미는 애벌레의 천적이다. 하지만 부전나비 애벌레는 알에서 깨어나면 스스로 개미굴을 찾는다. 개미는 먹잇감인 부전나비 애벌레를 개미굴로 데려가 애지중지 키운다. 이탈리아 토리노대 연구진은 2014년 국제 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부전나비 애벌레가 개미를 속이는 비결을 발표했다. 바로 여왕개미 성대모사다.

연구진은 부전나비 애벌레가 내는 소리를 녹음했다. 분석 결과, 끝까지 일개미의 보살핌을 받은 잔점박이푸른부전나비 애벌레는 개미굴에 들어와서 더 강하게 여왕개미 소리를 흉내 냈다. 당연히 일개미는 잔점박이푸른부전나비 애벌레를 애지중지했다.

부전나비 애벌레가 대담하게 여왕개미의 소리를 모방한 것은 일개미가 자신을 끝까지 책임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일개미는 환경이 나빠지면 알이나 애벌레는 제쳐두고 여왕개미만 보호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2009년 ‘사이언스’에 부전나비 애벌레가 내는 소리를 녹음해 들려주자, 일개미가 여왕개미 소리에 반응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일개미는 개미 애벌레는 내버려두고 부전나비 애벌레만 챙겼다. 과학자들은 부전나비 애벌레가 내는 소리가 여왕개미와 같았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곤충계의 해커들은 적을 피하고 속이는 데서 나아가 적을 부려 먹기까지 한다. 하지만 해커의 통신 교란도 인간 앞에 무력하다. 과학자들은 도시의 밤이 광공해와 소음으로 덮이면서 해커의 전략도 통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인간에게 신기술까지 가르쳐줬는데 배신당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