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 당시 아바의 공연 모습. /AFP연합
1974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 당시 아바의 공연 모습. /AFP연합


임희윤 문화평론가,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임희윤
문화평론가,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매년 6월 6일은 한국의 현충일일 뿐 아니라 스웨덴의 국경일이기도 하다. 덴마크가이끄는 칼마르 동맹에 반기를 든 혁명 지도자 구스타브 바사가 1523년 6월 6일 스웨덴국왕에 오름으로써 독립국가를 선포한 역사적인 날이다. 서울에서도 매년 이맘때면 주한스웨덴대사관이 주최하는 ‘스웨덴 데이’ 행사가 열린다. 스웨덴 현지 음악 산업 취재를 세 차례 다녀온 인연으로 나도 매년 이곳에 초대받는다.

현장에 가면 우리가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스웨덴 대표 기업들의 부스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이케아, 앱솔루트 보드카, 볼보, 일렉트로룩스, 에릭슨 같은 업체 말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세계를 호령하는 거대한 무언가는 거기 가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바로 노래, 음악이다. 스웨덴은 세계 3위의 음악 수출국이다. 인구 대비로 따지면 미국,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어, 스웨덴 가수 누가 있더라?’ 록시트, 에이스 오브 베이스, 켄트, 로빈, 카디건스, 아비치⋯. 가수나 그룹의 면면만 떠올리면 빙산의 일각만 보인다. 세계 음악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스웨덴이 낳은 수많은 작곡가와 프로듀서다.

올해 스웨덴 국경일에 즈음해서는 수도 스톡홀름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5월 31일(현지시각) 네 명의 스웨덴인이 스톡홀름에서 카를 구스타브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이다. 아니프리드 륑스타와 베니 안데르손, 비에른 울바에우스와 앙네타 펠트스코그. 약간은 낯선 네 명의 이름을 온전히 발음하기 전에 앞 글자만 모으면 힌트가 완성된다. A, B, B, A. 20세기 팝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세계적인 그룹. 아바(ABBA)다. 수출 3위 팝 강국의 뿌리에 이 희대의 팝 그룹이 있다.

볼보보다 높은 수익률… 수입의 85%는 세금

태초에 아바의 아빠가 있었다. 스웨덴 대중음악의 빅뱅인 아바 이전에 존재한 세례자 요한 같은 존재. 그가 바로 스티그 안데르손(1931~97)이다. 초등학교 화학 교사로 일하던 재즈 팬. 천부적 음악 재능을 바탕으로 작사가, 작곡가로 음악계에 발을 디딘 그는 이내 스타 발굴자이자 프로듀서로 전향한다.

두 개의 지역 인디 밴드를 관리하면서 두 팀에 각각 속해 있던 놀라운 원석, 베니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를 화학적으로 결합하기로 했다. 마침 두 사람의 여자 친구가 모두 노래 실력이 기막혔다. 1972년, 혼성 4인조의 탄생. 노래판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EURO)라 할 수 있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나간 아바가 ‘Waterloo’로 1위를 차지한 게 신호탄이었다.

‘Mamma Mia’ ‘Dancing Queen’ ‘Take a Chance on Me’ ‘Chiquitita’ ‘I Have a Dream’ ‘The Winner Takes It All’ ‘Super Trouper’….

별처럼 빛나는 히트곡은 열거하기 입이 아플 정도. 1992년 폴리그램은 아바의 히트곡 19개를 꾹꾹 눌러 담은 모음 음반 ‘Gold’를 냈는데, 이는 500만 장 넘게 팔려나가며 비틀스, 퀸, 이글스의 모음집과 함께 ‘그레이티스트 히츠(히트곡 모음집) 중의 그레이티스트 히츠’로 팝 역사에 남았다.

몇 년 전 찾은 스톡홀름 시내의 ‘아바 박물관’을 찾았다가 귀한 물건을 ‘직관’했다. ‘Gold’의 실제 금장 카세트테이프가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처럼 유리장 안에 담겨 박물관 한가운데에 진열돼 있던 것이다. 아바가 공연 때 입었던 반짝반짝한 의상을 비롯한 각종 소품과 자료는 물론이고 1976년 앨범 ‘Arrival’ 표지 촬영 때 썼던 소형 헬리콥터까지 전시돼 있었다. 놀라운 것은 ‘스웨덴 음악 명예의 전당’이 ‘아바 박물관’ 한편에 하나의 섹션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스웨덴 안에 아바’가 아니라 ‘아바 안에 스웨덴’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한국 속담의 생생한 예를 멀리 북구의 스톡홀름에서 확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바의 전성기 이야기로 돌아가자. 안데르손-울바에우스 콤비가 쓰는 곡마다 족족 해외 차트를 휩쓰니 돈이 5대양 6대주에서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문제는 복지국가 스웨덴의 높은 세율. 볼보보다 수익률이 높았지만, 아바는 번 돈의 거의 85%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은 경제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가 복안을 냈다. 스포츠용품 회사를 인수해 운영하며 러시아와 원유 무역을 벌이고, 자전거 회사를 인수하는 식으로 이윤을 재투자하고 돈을 전방위로 굴리면서 회사 몸집을 키워나간 것이다. 그런데 악재는계산기가 아니라 사람의 심장에서 튀어나왔다. 결혼했던 두 커플, 즉 네 멤버가 모두 파경에 이르면서 아바는 1982년 해체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노래 사용권 등 음악 권리에 관련한 막대한 수익은 계속해서 네 멤버와 스티그 안데르손의 통장에 꽂혔다.

노래로 세계를 제패한 아바는 모든 스웨덴인의 자부심이자 우상이 됐다. 팝적 감각에 초점을 맞춘 스웨덴의 탄탄한 음악 공교육 시스템도 스웨덴 대중음악의 성공에 한몫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합창 수업 레퍼토리로 동요나 가곡에 천착하는 대신 팝과 록을 적극 권장하는가 하면, 믹싱과 마스터링 같은 사운드 편집 기술도 원하면 배울 수 있게 했다. 음악 전문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에서 말이다.

노래와 음악을 유달리 사랑하는 스웨덴인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인구 1000만 명 가운데 약 60만 명이 합창단원이다. 스웨덴인은 하루 평균 101분 동안 음악 감상을 한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용하는 스웨덴인은 인구의 55%에 달한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 다음으로 많은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을 보유한 스톡홀름에서 2008년 탄생한 것이 현재 세계 1위 음원 플랫폼인 ‘스포티파이’다. 스티브 잡스보다 한참 덜 알려진 다니엘 에크가 만든 이 기업은 잡스가 거들먹거리며 청바지 프레젠테이션을 거듭한 아이튠스 스토어, 애플뮤직을 깨부수고 세계 음악 소비의 판도를 바꿔 버렸다.

음악 좋아하는 스웨덴인이 일찌감치 호응했다. 2012년 스웨덴 음악 산업 매출에서 디지털 스트리밍이 차지하는 비중은 91%에 달해 당시 세계 평균의 10배를 상회했다.

뉴진스의 ‘How Sweet’도 메이드 인 스웨덴

1980·90년대로 돌아가 볼까. 아바가 잠시 내려둔 바통은 메탈 밴드 ‘유럽’, 팝 듀오 ‘록시트’를 거치며 다이너마이트처럼 불어나 스톡홀름의 클럽 DJ 출신 프로듀서 데니스 팝에게까지 갔다. 1992년, 스톡홀름 시내에 셰이론 스튜디오를 세운 데니스 팝은 당시 오합지졸이던 ‘백스트리트 보이스’란 미국 보이그룹을 대서양 건너 날아오게 했다. 그가 음악을 도맡아 제작한 백스트리트 보이스, 엔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모두 미국에 돌아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절정을 맛보기 전, 데니스 팝은 안타깝게도 위암으로 35세에 요절한다.

메탈 밴드 보컬 출신으로 데니스 팝 밑에서 일을 배우던 조수가 스승이 남긴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데, 그가 2024년 현재까지 30년째 최고의 팝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맥스 마틴이다. 예명만 보면 영락없는 미국인이지만, 그의 본명은 카를 산드베리. 스톡홀름 토박이다. 마틴은 지난 3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을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한 작곡가가 됐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신곡으로 스물일곱 번째 정상에 오르면서 마틴은 존 레넌(26회)을 제치고 이제 폴 매카트니(32회)의 기록만 바라보게 됐다.

스웨덴 음악은 우리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다. 몇 년 전 남북 문화 교류 행사 때 평양에서도 울려 퍼졌던 레드벨벳의 ‘빨간 맛’부터 요즘 핫한 뉴진스의 ‘How Sweet’까지 수많은 곡이 스톡홀름에서 날아온다.

내 스웨덴 친구 가운데는 작곡가 마리아 마르쿠스가 있다. 조용필의 ‘Hello’, 레드벨벳의 ‘7월 7일’, 방탄소년단 정국의 ‘Stay Alive’ 를 만든 마르쿠스의 애창곡은 아바의 ‘Thank You for the Music’이다. 

얼마 전, 그의 부사수 격인 열네 살 연하의 작곡 파트너 루이스 프리크 스벤을 함께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마르쿠스와 방탄소년단의 곡을 합작한 스벤은 “어려서부터 K팝을 들으며 자랐고 언젠가 한국에 정주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며 말 그대로 꿈꾸는 듯한 눈빛을 반짝였다.

스웨덴 음악의 저력은 그렇게 또다시 대를 이어 K팝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