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인들은 제주도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제주도 이주 바람이 불었을 때 소위 말하는 ‘육지 건설사’가 들어와서 고급화 전략으로 비싸게 지어 미분양이 늘어났는데, 그게 지금 투자 심리를 다 죽인 거다. 제주도는 관광과 건설이 무너지면 큰일 난다.” (제주 현지 A시행사 대표)
6월 10일 방문한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한화포레나 제주에듀시티’ 공사 현장은 주변에 인프라가 거의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제주영어마을 안의 학교들과는 자차로는 10분, 대중교통으로는 20분, 걸어서는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지도상으로 봐도 영어마을과는 꽤 동떨어진 위치다.
이 단지는 한화건설이 짓고 있는 503가구규모의 아파트 단지다. 2025년 1월 준공 예정으로 지난 2022년 9월 분양했지만, 제주도 내에서 가장 많은 미분양가구가 발생한 단지가 됐다. 지난 3월 말 기준 미분양 규모는290가구로, 전체 가구의 57%가 넘는다. 분양가는 전용 84㎡ 기준 6억7000만원부터다.
인근 B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제주 도민에게 차로 20분 이상 거리는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할 정도로 먼 거리”라며 “단지와 영어마을까지 거리가 꽤 있는데, 서울 사람 기준으로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지은 것 같지만 처음부터 미분양이 예상된 단지였다” 고 설명했다.
읍·면 지역 고분양 아파트가 미분양 원인
제주도 부동산 시장이 침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시내 아파트 미분양과 상가의 공실 증가, 읍·면 지역의 빈집 문제까지 수면 위로 올랐다. 제주 현지 관계자들은 수년 전부터 계속된 ‘제주살이’ 열풍을 탄 무분별한 개발이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외지인 수요가 감소하면서 투자 심리도 위축됐다는 분석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제주 미분양 주택은 2837가구다. 3월(2485가구)과 비교해서 14.2% 증가했고, 전국 미분양 가구의 4%를 차지하고 있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전체 미분양 주택의 43.7%(1241가구)다. 전국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이 1만2968가구 수준인데, 이 중 10%에 해당하는 물량이 제주에서 나온 것이다. 지역 부동산 관계자들은 특히 ‘읍·면 지역’에서 미분양이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제주의 도심지인 신제주 지역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3월 기준 제주의 미분양 주택을 살펴보면 읍·면 지역 미분양 주택이 1735가구로 69.8%였다. 애월읍이 616가구로 가장 많았고, 대정읍 376가구, 안덕면 293가구, 조천읍 263가구, 한경면 185가구순이었다.
A시행사 대표는 “7~8년 전 제주 이주 열풍 당시 제주에서도 시골로 통하는 한적한 지역에 짓기 시작한 아파트들이 외지인 수요가 없어지고 도민들에게도 외면당하면서 미분양 물건으로 남게 됐다”며 “평균적으로 84㎡ 기준 분양가가 4억~5억원이었는데, 이제는 읍·면 지역에서도 브랜드 단지들이 들어오면서 7억~8억원까지 올랐다”고 했다.
실제로 행정구역상 ‘동’과 ‘읍·면’ 지역 미분양 가구 비율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신제주 지역 연동에 있는 ‘더샵 연동포레·노형포레’ 는 전체 120가구 중 11가구 수준으로 미분양 가구가 적은 편이지만 한경면 청수리에 위치한 ‘제주에듀루치올라’는 2020년 준공에도 99가구 중 48가구가 미분양으로 남아있다.
상황이 이렇자 아파트 매매가격 하락세도 면치 못하고 있다. 제주도의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누적 아파트 매매가격 변동률은 -1.17%다. 전국 평균 -0.73%보다 하락 폭이크다. 제주 건설 업계 관계자들은 우선 투자 심리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제주도 현지 시공사 관계자는 “한시적으로라도 취득세, 양도세 등 다주택자 중과를 제주도 상황에 맞게 완화해 줄 필요가 있다”며 “제주 제2 공항 여부 역시 계속 미뤄지고 있어 정책 불확실성도 큰 상황”이라고 했다.
내국인 관광객 감소, 인구 유출에 번화가도 한산
상권도 얼어붙긴 마찬가지다. 6월 11일 오후 찾은 제주시 연동의 누웨마루 거리 일대 상가는 두 집 걸러 한 집 수준으로 ‘임대 문의’가 붙어 있었다. 메종글래드 제주 사거리 인근에서 시작되는 거리 초입부터 삼무공원 사거리 방향으로 이어진 상가 중 비어있는 1층 상가만 약 17개였다. 이날 만난 연동에서 의류매장을 하는 C씨는 “지난해 12월부터 매출이 3분의 1 이상 줄었다”며 “거리엔 내국인 관광객이나 제주 사람은 거의 없고 중국인밖에 없는데, 상가는 점점 비어가는 와중에 중국인에게 최근 인기 있는 음식인 뼈해장국 집 거리가 생겨 버렸다”고 했다. 지난 1분기 중대형 상가와 집합 상가의 공실률은 전년도보다 올랐다. 1분기 제주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8.8%로 전년 동기(8.4%) 대비0.4%포인트 올랐다. 임대료는 ㎡당 1만4300원으로 동일했다. 집합 상가 역시 같은 기간 임대료는 ㎡당 1만2000원으로 동일했지만, 공실률이 11.7%에서 15.9%로 올라갔다.
반면 소규모 상가는 오히려 공실률이 5.5%에서 3.8%로 낮아졌는데,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배달 고객이 증가하면서 선호하는 매장 크기가 작아진 탓이다. 중대형 상가와 집합 상가의 공실률이 올랐다는 것은 직접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이 감소하고 있다는 의미다.
제주 상권이 침체기를 거치는 동안 상업 시설 등 도내 상업용 부동산의 경매 물건도 많이 늘어났다. 경·공매 데이터 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제주도 내 업무와 상업 시설 경매 건수가 지난해 12월부터 100건대 이상으로 늘었다. 지난해는 한 달 평균 60건 정도였다. 지난 4월의 경매 건수는 165건으로 3월에 비해 34%나 늘었는데, 2009년 11월 한 달간 207건의 상업 시설 경매가 진행된 이후 두 번째로 많다.
단독주택 수요 없고 음식점·카페로 개조도 줄어
‘빈집’ 역시 늘고 있다. 미분양 된 아파트나 빌라뿐 아니라 리모델링용으로 인기가 있던 단독주택과 농어촌 주택의 인기도 사그라들었다. 한때 민박이나 카페 등으로 사용하려는 수요가 있었지만, 제주도 인구가 계속 유출되면서 이 같은 수요마저 줄어든 것이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일대 마을 초입에는 무성한 잡초로 둘러싸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빈집이 눈에 띄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곳이 과거에 집이었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다. 2023년 정부가 진행한 전국 빈집 실태 조사에서 제주 지역 빈집은 최소 1257가구, 그중에서도 94% 이상은 농어촌 지역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도에서 추정하는 빈집은 두 배 이상인 3500가구에 이른다.
제주에서 빈집은 한때 인기 있는 매물로 꼽혔다. 2011~2016년 ‘제주살이’ 열풍이 불면서 농어촌 주택도 고가에 거래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주민들이 ‘마을마다 10가구씩은 빈집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할 정도다. 제주도의 청년층과 장년층이 농어촌을 떠나면서 고령화가 뚜렷해졌기 때문인데, 지난해 1월부터는 제주도 전출 인구가 전입 인구를 넘어섰다. 인구 순 유출이 발생한 건 2009년 이후 처음이다.
제주도는 한국부동산원에 의뢰해 지난 2월부터 오는 12월까지 빈집으로 추정되는 주택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 중이다. 실태 조사 대상인 빈집은 1년 이상 아무도 거주 또는 사용하지 않은 주택을 말한다.
제주도에서 빈집을 리모델링해 숙박 시설로 만드는 스타트업 ‘다자요’의 남성준 대표는 “지자체에서 하는 것보다 성공적인 빈집 활용 사례일 경우 수리 비용 등에 대해 행정적인 지원이나 금융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비슷한 빈집 활용 사업들이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