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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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783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1787년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연방정부를 수립했다. 연방에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국가(주)가 참여했다. 연방정부는 전쟁 영웅으로 채워졌다. 새 국가는 단기간에 급속한 성장을 이뤘고,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정치 갈등이 정당의 형태로 굳어졌다.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 지역에서는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존 애덤스 등이 중심이 된 연방당(Federalist·지금의 공화당)이 형성됐고, 농업이 발달한 남부에서는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등이 중심이 된 공화당(Republican·지금의 민주당)이 만들어졌다. 당시 미국은 오늘날처럼 강력한 연방국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유럽연합(EU)처럼 연방국과 지방국이 주권을 분점한 국가연합 행태를 취하고 있었다. 연방파는 상공업이 발달한 강력한 연방국을 만들기를 원했고, 공화파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느슨한 국가연합으로 남기를 원했다. 하지만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미국의 목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화폐의 부족과 막대한 전쟁 부채가 그것이었다. 당시는 금본위제였기 때문에 귀금속(금·은)이 화폐로 사용됐다. 당시 미국에서는 귀금속이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금속을 확보하는 방법은 수출에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1970~80년대 한국이 종이금(달러)을 확보하기 위해 신발과 해산물 수출에 목을 매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미국 은행'과 헌법 논쟁

1791년 연방파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금도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국법은행(National Bank)과 주법은행(State Bank)으로 구분된다. 국법은행은 연방법에 따라 설립된 은행으로 미국 전역에서 영업할 수 있고, 주법은행은 주법에 의해 설립된 은행으로 해당 주 내에서만 영업할 수 있다. 오늘날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미국 은행을 자신의 뿌리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 은행은 연방법에 의해 설립된 상업은행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에 해당한다. 금본위제 아래에서는 금의 자동 조정 기능 때문에 통화정책이 필요하지 않다. 금의 자동 조정 기능이란 상품의 수출입이 자국의 통화량(금 보유량)과 물가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해밀턴은 미국 은행이 연방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이고, 무역과 상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며, 정부 부채를 상환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해밀턴의 이러한 구상은 제퍼슨, 매디슨 등 공화파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미국 헌법이 국법은행의 설립을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방법으로 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주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고, 미국 은행은 대다수 국민(농민)의 희생하에 소규모 집단(자본가)에게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해밀턴은 의회 다수파와 대통령(조지 워싱턴)을 설득했고, 미국 은행이 설립됐다. 이에 긴장한 일부 주에서는 주법은행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주법은행은 은행권(bank note)을 발행했는데 정화가 부족한 다른 주에서는 이런 은행권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각 주 사이에 주법은행 설립 경쟁이 촉발됐다. 은행권이란 금 보관증을 말한다. 영어의 ‘note’ ‘check’ ‘bill’은 각각 보관증, 수표, 어음을 의미한다. 식민지 시절 조선은행에 은행권을 들고 가면 금을 돌려받았지만, 오늘날 한국은행에 은행권을 들고 가면 종이(은행권)만 돌려받는다. 왜 그럴까. 오늘날 미국 중기국채(만기 2~10년)는 ‘treasury note’로 불린다. 이건 또 왜 그럴까. 힌트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군소 은행 죽이기

미국 은행은 연방정부 신용의 원천이자 유일하게 특허를 받은 주간 은행(interstate bank·전국적으로 영업하는 은행)이었지만 중앙은행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이 은행은 통화정책을 수행하지 않았고, 민간은행을 규제하지 않았으며,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이 은행은 명목화폐가 아닌 자본금으로 뒷받침되는 돈(은행권)만 발행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은행이 찍어내는 종이돈은 종이로만 뒷받침된 명목화폐인 반면, 당시 미국 은행이 발행한 종이돈은 자본금(금)에 의해 뒷받침된 실질 화폐였다. 미국 은행의 특허 기간(20년)이 끝나던 1811년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매디슨은 미국 은행의 특허를 갱신하고 싶어 했다. 매디슨은 공화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애팔래치아 서부에서 벌어진 영국과 군사적 긴장을우려했다. 매디슨 대통령이 이념 대신 현실을 역설했지만, 연방의회에서는 단 한 표 차이로 미국 은행 경신 법안이 부결됐다. 주법은행들이 미국 은행의 특허 경신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주법은행권이 미국 은행에 예치되면, 미국 은행은 이 은행권을 회전시키지 않고 곧장 주법은행에 제시하여 금을 인출해갔다. 주법은행에서 금이 인출되면 주법은행의 은행권 발행 능력이 제한되고, 적정한 수준의 준비금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미국 은행은 이런 식으로 경쟁자의 유동성을 고갈시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은행을 도산시켰다. 당시는 건달 3~4명이 모이면 시골 은행을 털 수 있는 목가적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장 지배적 사업자의 지배권 남용을 규제하는 공정거래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풍문에 의하면 1990년대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이 특정 종금사가 발행한 단기어음을 시장에서 대량 매집한 뒤 일시에 지급제시하여 해당 종금사를 파산시킨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

나폴레옹전쟁의 여파로 1812년 미국과 영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전비 조달에 애를 먹었고 국법은행 부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국법은행이 부활한 것은 1812년 전쟁이 끝난 후였다. 연방당은 개전 초기부터 전쟁에 반대했고 미국인은 굴욕감을 느꼈다. 전후 연방당은 붕괴했고, 거의 모든 정치인이 공화당에 가입했다. 장자크 루소를 읽지 않은 사람도 정당 정치의 소멸을 예상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탐욕과 명분을 사이에 두고 정치적 균열이 발생했다. 가장 큰 이슈는 미국 은행 재설립 문제였다. 1815년 제임스 먼로 국무장관은 매디슨 대통령에게 미국 은행이 설립되면 지역(주)의 상업 부문이 연방정부의 통제하에 들어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방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화폐·금융 시스템에 대한 정치적 지원은 전후 경제성장과 토지 붐을 불러왔고, 동부 자본가와 서부·남부 지주의 이해관계를 결합했다. 

하지만 미국 은행이 부활한 근본적 이유는 미국 경제가 단순한 ‘농업경제’에서 금융과 산업이 상호 의존하는 ‘산업 경제’로 변화한 데 있었다. 광대한 서부 지역이 백인 정착민을 위해 개방됐고, 증기력과 은행신용(대출)이 강력하게 경제 발전을 견인했다. 공화당내 수정주의자는 팽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연방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16년 공화당은 분열됐고, 칼 훈과 헨리 클레이가 이끄는 수정주의자가 제2 미국 은행 설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은행은 특권을 부여받았다. 전국 어디든 지점을 만들 수 있었고, 국가 차원에서 은행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독점권을 누렸다. 연방정부는 은행 주식의 5분의 1을 매입하고, 이사의 5분의 1을 임명했다. 연방정부는 모든 연방 예산을 미국 은행에 예치했고, 미국 은행은 자체 발행한 은행권을 지급하고 연방 채권을 매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