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는 담배가 한 해 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밝혔다. 그중 130만 명은 다른 사람이 피운 담배 연기에 이차 노출된 사람이다.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담배가 갓 태어난 아기를 살릴 구원군으로 180도 변신했다. 담뱃잎에 모유의 영양분을 만드는 유전자를 넣어 대량생산하는 것이다. 담뱃잎은 빨리 자라고 재배도 쉬워 의약품 생산 기반이 약한 저개발국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미 코로나19 백신과 면역 증강제 생산에도 활용됐다.
아기의 장내 세균 먹이 될 올리고당 합성
미국 UC 버클리 식물미생물학과의 패트릭 시(Patrick Shih) 교수 연구진은 모유에 있는 올리고당을 ‘니코티아나 벤타미아나(Nico-tiana benthamiana)’에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호주가 원산지인 이 식물은 사람이 피우는 담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니코티아나 타바쿰(Nicotiana tabacum)’과 같은 담배 속(屬) 식물이다. 연구 결과는 6월 13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 푸드(Nature Food)’ 에 실렸다.
모유에는 올리고당이 약 200가지 있다. 올리고당은 모유에서 세 번째로 많은 고체 성분이기도 하다. 수유 중인 아기는 올리고당을 소화하지 못한다. 대신 생후 몇 주 동안 아기의 장에 사는 좋은 미생물의 먹이인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가 된다. 아기 몸에 건강한 장내 세균이 자라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병원체 감염을 막는다.
식품 업계는 이미 대장균 발효 방식으로 모유 올리고당 일부를 생산하고 있다. 대장균에 올리고당 유전자를 넣어 생산한다. 하지만 발효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 올리고당 종류가 몇 안 될 뿐만 아니라 정제 과정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일도 쉽지 않다.
UC 버클리 연구진은 식물이 단당류라는 단순 당을 사슬처럼 연결해 올리고당처럼 복잡한 당을 만드는 기능을 이용했다. 식물이 단당류를 이용해 다양한 모유 올리고당을 조립하는 데 필수적인 효소를 만들도록 유전자를 변형했다. 그 결과 벤타미아나 담뱃잎은 모유 올리고당 11종을 생산했다.
시 교수는 “세 가지 주요 인간 모유 올리고당 그룹을 모두 만들었다”며 “이 세 가지 그룹을 하나의 유기체에서 동시에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담뱃잎이 만든 올리고당에는 병원체 감염을 막는 LNFP1도 포함됐다. 이 올리고당은 단당 5개가 연결된 복합 당인데, 대장균 발효 방식으로는 대량생산할 수 없는 종류다.
시 교수는 논문 공동 저자인 양민량(Min-liang Yang)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식품공학과 교수와 함께 식물에서 모유 올리고당을 산업 규모로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추정한 결과, 미생물 발효 방식보다 더 저렴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 교수는 “식물에서 모든 모유 올리고당을 추출해 바로 유아용 분유에 첨가할 수 있다”며 “이 방법은 아기를 위한 분유나 성인을 위한 식물성 우유를 더 저렴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백신, 면역 증강제도 생산
이번 연구는 농작물로 의약품을 만드는 ‘파밍(pharming·분자 농업)’의 성과다. 파밍은 약(pharmaceutical)과 농업(farming)의 영어 단어를 합친 말이다. 담뱃잎 파밍은 코로나19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담뱃잎에서 백신용 바이러스 단백질을 합성한 데 이어 면역반응을 높이는 면역 증강제까지 만들어냈다.
앞서 일본은 독감 백신을 담뱃잎에서 만들었고, 국내 기업인 바이오앱은 돼지열병 바이러스를 막는 백신을 세계 최초로 담뱃잎에서 생산했다. 미국 켄터키 바이오프로세싱(KBP)은 캐나다 메디카고와 2014년 에볼라 치료제인 ‘지맵(ZMapp)’ 개발에도 참여했다. 지맵은 에볼라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세 가지 종류의 항체로 이뤄졌는데, 모두 벤타미아나 담뱃잎에서 생산했다. 2018년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연구진은 노로바이러스 백신을 담뱃잎에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노로바이러스에 매년 7억 명이 감염되고 그중 20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캐나다 바이오 기업인 메디카고(Medica-go)와 영국 제약 기업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2022년 2월 세계 처음으로 담뱃잎으로 만든 코로나19 백신 ‘코비펜즈(COVI-FENZ)’를 캐나다에서 승인받았다. 메디카고는 니코티아나 벤타미아나에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자를 넣어 바이러스 유사 입자를 생산했다. 여기에 GSK의 면역 증강제를 함께 썼다.
메디카고가 담뱃잎에서 추출한 입자는 겉모양은 바이러스와 똑같지만, 유전물질이 없어 인체에 들어가도 복제되지 않는다. 그만큼 안전성이 높다. 더 큰 장점은 속도다. 독감 백신처럼 달걀에 바이러스를 주입해 백신을 만들면 6개월이 걸리지만, 담뱃잎 백신은 6주면 된다. 유전자 합성 방식인 미국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도 생산 속도가 비슷하지만, 대량생산은 식물 재배가 훨씬 쉽다.
영국의 민간 연구소인 존 인스 센터(John Innes Centre)는 2023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면역 증강제인 사포닌을 담뱃잎에서 생합성했다”고 밝혔다. 키라야 나무에서 추출하는 사포닌인 QS(Quillaja Saponin) 중 QS21은 대상포진과 말라리아 백신에 쓰이고 있으며, QS7과 QS17은 코로나19 백신에 들어갔다.
존 인스 센터 연구진은 사포닌 생합성 경로를 키라야 나무가 아닌 담뱃잎에서 구현했다. 키라야 나무는 10년 이상 돼야 키라야 사포닌을 생산할 수 있어, 전 세계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반면 담뱃잎은 한 달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빨리 자라 대량생산이 쉽다. 연구진은 키라야 사포닌 생산에 관여하는 효소 유전자 14개를 토양 박테리아를 통해 벤타미아나에 주입해 사포닌을 생산했다. 먼 미래 우리 후손은 담배 하면 인명을 해치는 연기보다 사람을 살리는 약을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