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왼쪽)와 블러. /로이터연합
오아시스(왼쪽)와 블러. /로이터연합
임희윤 문화평론가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임희윤 문화평론가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팝 뮤직(대중음악)을 뜻하는 ‘팝’ 앞에 국가, 지역, 대륙을 따서 붙인 용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라틴팝, 프렌치팝 정도가 떠오른다. 그간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서 팝, 팝송은 대개 미국, 영국을 위시한 서구권의 대중음악, 그것도 선진적이며 유행을 선도하는 히트 음악을 가리켰다.

‘케이팝(K-Pop·이하 K팝)’의 글로벌 인기는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1950년대 보사노바 열풍부터 2010년대 레게톤(reggae-ton) 붐까지 이어진 라틴팝의 인기도 비팝(B-Pop·브라질 팝)이나 피팝(P-Pop·푸에르토리코 팝)이란 줄임말을 용인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한국 팝(Korean Pop)의 줄임말인 K팝은 그 존재 자체로 불가사의에 가까우며, 동시대 세계 팝 지형도의 여러 양상을 은유적으로 대변한다. 역시 ‘K’로 시작하는 수많은 국가(이를테면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등)의 팝은 여전히 세계 팝계에서 그 존재감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포함해서⋯.

여기, 브릿팝(Britpop)이 있다. 1990년대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섬에서 출발해 세계 음악계를 강타했던 물결이다. ‘Don’t Look Back in Anger’ ‘Wonderwall’로 유명한 오아시스를 비롯해 블러, 스웨이드, 펄프 같은 쿨하고 힙한 영국 밴드들이 일으킨 이 불세출의 붐은 1960년대 비틀스가 촉발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과도 결이 다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말 그대로 인베이전, 즉 침공이며 침공의 대상 또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그러니까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 반영된 단어다. 하지만 브릿팝은 미국 주위를 도는 공전이 아닌 자전하는 항성처럼 빛을 발했다.

브릿팝으로 이어진 美 ‘그런지’ 열풍

브릿팝을 낳은 나비 날갯짓은 사실 북대서양 건너편, 미국 대륙에서 왔다. 그것도 차라리 태평양 연안에 더 가까운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 같은 그쪽 밴드가 폭발시킨 그런지(grunge) 장르가 미국 X 세대의 호응을 얻은 배경에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연임 체제와 기나긴 레이거노믹스 그리고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의 취임까지 이어지는 보수적 사회 분위기와 경제 상황이 있었다. 그런지 밴드들은 패션부터 세련됨을 거부했다. 중고 의류점에서 산 헐렁하고 후줄근한 플란넬 셔츠, 찢어진 청바지, 감은 지 오래된 어중간한 장발이 트레이드마크. 음악적으로는 1970년대 영국에서 기인한 단순하고 파괴적인 펑크 록에, 1980년대 미국 캠퍼스 인디 록의 자유분방한 실험 정신과 전기 노이즈 활용법을 결합했다. ‘Smells Like Teen Spirit(1991년 너바나 발표)’을 여는 네 개의 천둥 같은 파워 코드(power chord)는 X 세대를 위한 운명 교향곡이었고 그것은 운명의 노크 소리처럼 전 세계 또래 젊은이에게 봉홧불처럼 타전됐다. 이를테면 멀리 대한민국에서도 인디 신(scene)의 촉매제로 작용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대서양 건너 영국은 지척이었고 그 영향력은 거의 직접적이었다. 더욱이 리액션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반발 말이다. 그런지의 니힐리즘은 ‘미국 애들 얘기’였고, ‘우리에겐 우리만의 사운드가, 영국적 새로움이 필요하다’는 게 음악계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그에 맞춰 나타난 오아시스와 블러는 1990년대 브릿팝 열풍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브릿팝은 당시 영국이 내세운 국가 브랜드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의 정수이기도 했다. 미국의 그런지와 얼터너티브 록에 열광하던 세계의 젊은이가 이젠 오아시스 편과 블러 편으로 갈라섰다. 두 팀은 고맙게도 피 튀기는 경쟁을 했다. 1995년은 브릿팝이란 단어가 영국과 세계 매체에 가장 많이 등장한 해였다. 1995년 8월 14일은 아직도 영국 록 역사에서 ‘브릿팝 결전일(The Battle of Britpop)’로 불린다. 라이벌인 두 팀이 하필 같은 날 신곡을 내자 영국 언론이 “헤비급 세계 챔피언전”이라고 호들갑을 떤 것이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시대가 재림한 듯한 열기였다.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자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만방에 떨쳤다.

1994년 4월 25일, 미국의 커트 코베인이 사망한 지 불과 20일 되는 날 발표된 블러의 앨범 ‘Parklife’, 그해 8월 발매된 오아시스의 음반 ‘Definitely Maybe’는 브릿팝의 선언문이 돼줬다. ‘Parklife’의 첫 곡 ‘Boys & Girls’ 는 그런지의 육중한 헤비메탈식 드럼 대신 뿅뿅 대는 전자 드럼 머신(drum machine)을 활용한 뒤틀린 CM송 같았다. 오아시스의 노래 ‘Live Forever’는 ‘서서히 사라지느니 한 번에 타버리는 게 낫다’는 코베인의 염세적 유서를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다 영원히 살자’는 유쾌한 청유로 비틀었다. 

토니 블레어(왼쪽)가 1997년 7월 열린 총리 당선 축하 연회에서 당시 오아시스 멤버였던 노엘 갤러거와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AP연합
토니 블레어(왼쪽)가 1997년 7월 열린 총리 당선 축하 연회에서 당시 오아시스 멤버였던 노엘 갤러거와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AP연합

오아시스 보려고 英 국민 절반이 ‘예매 전쟁’

영국인은 1996년 8월을 미국인의 1969년 8월처럼 회상한다. 1969년 8월 중순 미국 뉴욕주의 허허벌판을 46만 명의 히피가 메웠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처럼, 1996년 8월 10일과 11일, 총인원 25만 명이 잉글랜드 교외 넵워스의 들판에 운집했다. 지미 헨드릭스나 재니스 조플린이 아니라 오아시스, 단 한 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저 공연을 예매하기 위해 영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전화통 붙잡고 ‘예매 대전’에 참전했다는 비공식 기록도 있다.

브릿팝의 광의는 팝 ‘뮤직’의 경계를 넘는다. 팝 컬처, 그러니까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른다. 미술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와도 밀접한 사슬을 걸치고 있다. 근년에 서울을 미술 애호가의 도시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행사로 ‘프리즈(Freeze) 서울’이 있다. 프리즈의 고향은 영국 런던이다. 1990년대를 대표한 아트 콜렉터이자 광고 사업가 찰스 사치는 1988년 데이미언 허스트가 아티스트 그룹 YBA(Young British Artists)를 중심으로 열었던 ‘프리즈’에서 큰 감명을 받고 브릿팝 시대의 메디치(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예술 후원 가문)와 비슷한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허스트는 골드스미스대 동기인 블러 멤버와 우정을 과시했고, YBA의 제니 새빌은 브릿팝 대표 밴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앨범 표지를 맡기도 했다.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노동당의 새로운 기수로서 영국 대중문화의 자존심을 대외 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블러의 데이먼 앨번의 지지를 얻으며 영국 젊은이를 자신과 신노동당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진력했다. 1993~96년 국내외에서 전성기를 누린 브릿팝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1997년부터 팝 분야에서는 스파이스 걸스가, 록 분야에서는 라디오헤드, 버브, 트래비스, 콜드플레이 같은 새로운 기수들이 각광 받으면서 브릿팝이란 말은 과거의 향수(鄕愁)라는 시간 축을 향해 점점 후퇴해 갔다.

그러나 브릿팝이란 브랜드는 한편으로 굳건하다. 필자는 브릿팝 대표 밴드인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의 멤버 그리고 브릿팝의 후예라 할 수 있는 포스트브릿팝(post-Britpop)으로 수식되는 밴드 콜드플레이, 트래비스의 멤버들과 모두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들 중 절대다수는 브릿팝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거부반응이나 체념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또는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건 그냥 사람들이 붙인 상표 같은 거예요. 때론 그 상표를 정부가 붙였죠.” 그들 중 하나인 음악가 A의 말이다.

뜻밖에 K팝 기획사 임직원들도 만나서 흉금을 털다 보면 이와 비슷한 말을 종종 한다. “정부는 큰 행사 있을 때마다 K팝 동원령 비슷한 걸 내려요. 별수 있나요? 상대는 정부인데.” 20년 뒤, 30년 후의 K팝은 어떤 브랜드로 기억될까. 여전히 자랑스러운 K일까. 퇴색한 기억 속 K일까. 역사는 흐르고 팝은 ‘팝!’ 하고 튀어나왔다 사라진다. 그렇게 지구는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