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더 무비 데이터베이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더 무비 데이터베이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올해 7월 한국에서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 는 독일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의 2023년 작품이다. 영화는 도쿄에서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중년 남성 히라야마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정해진 루틴을 따라 반복되는 그의 매일은 수도승의 삶을 닮았다.

동틀 무렵, 히라야마는 거리의 빗자루질 소리에 눈을 뜬다. 침묵 속에서 이불을 개고, 소박한 다다미방의 한구석에 정갈하게 포개어 놓는다. 양치질과 세면 후에는 어린 식물들에게 물을 준다. 분무기를 쥔 손과 잎사귀를 조심스럽게 감싸는 손이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문밖으로 나와 신선한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하루가 시작된다. 늘 같은 캔 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 들고 청소 작업 트럭의 시동을 건다. 오래된 카세트 음악과 함께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시부야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스카이트리의 형체가 들어온다.

일터인 화장실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침묵을 유지하며 청소 작업에 몰두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히라야마는 녹음이 푸르른 신사의 공원으로 향한다.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즐긴다. 간결한 식사 후에는 매일 기록하는 일기처럼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지하철역 한구석의 단골 선술집으로 향한다. 하루를 반추하고 다음 날을 준비하는 의식처럼 소주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한 후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창밖의 빗자루 소리가 또 다른, 그러나 또 같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제로의 삶과 공간

히라야마의 일상은 단조롭게 반복되면서 더 이상 덜거나 채울 필요 없는 완벽한 제로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그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유롭게 반응하도록 돕는다. 그의 입은 대부분 침묵하지만, 호기심에 찬 눈은 늘 주변을 감각하며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같은 찰나의 순간들이 그의 견고한 루틴으로 초대되고, 새로운 일상의 의미들이 재탄생한다. 히라야마의 일상적 단편들은 정적으로 보이지만, 날마다 짙게 중첩되면서 깊은 잔향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공간들은 일상의 가치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것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히라야마의 집은 최소한의 것만 갖춘 작고 낡은 공간이다. 그러나 이 집은 히라야마에게 소중한 중고 책과 식물, 사진이 더불어 살고, 가끔 손님에게 잠자리도 내어줄 수 있는 그만의 넓고 풍족한 세계로 묘사된다. 트럭의 좁은 운전석은 오래된 팝송과 캔 커피와 함께 도쿄의 풍경을 선사하는 근사한 카페로 변모한다. 동시에 히라야마가 감정에 복받쳐 울고 웃기도 하는 도시 속의 은밀한 내적 공간으로도 확장된다.

일상의 의미

잔잔한 일상의 의미를 소중히 하는 히라야마의 태도는 공중화장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자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공중화장실은 가장 무미건조한 장소다. 사람들은 일상 가운데 원초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잠시 화장실을 찾고, 곧 스쳐 지나간다. 따라서 공중화장실은 누구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 주인 없는 장소로 남는다. 이곳을 청소하는 직업 역시 종종 화려한 도시의 이면으로 감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라야마는 매일 아침 화장실에 들어서며 종교의식과 같이 정성스럽게 청소를 시작한다. 바닥의 쓰레기를 줍고, 변기와 타일 벽을 구석구석 닦는 그의 손길은 고요하고 섬세하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면대 하부까지 손거울로 확인하며 청소하는 모습에서는 깊은 성찰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읽힌다. 청소하던 히라야마가 매끈히 닦인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응시한다. 이 장면은 주어진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그의 태도가 결국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음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토 도요가 설계한 화장실, 반 시게루가 설계한 화장실, 후미히코 마키가 설계한 화장실, 사카쿠라 다케노스케가 설계한 화장실. /‘더 도쿄 토일렛’ 홈페이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토 도요가 설계한 화장실, 반 시게루가 설계한 화장실, 후미히코 마키가 설계한 화장실, 사카쿠라 다케노스케가 설계한 화장실. /‘더 도쿄 토일렛’ 홈페이지

시부야 공중화장실의 변화

영화에는 히라야마의 동선을 따라 시부야 곳곳의 공중화장실이 등장한다. 이들은 단순히 기능만이 강조된 무표정의 공중화장실이 아닌, 독특한 개성의 건축물들이다. 모두 2020 도쿄올림픽과 패럴림픽을 계기로 추진된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일본 재단은 국가적인 행사를 맞아 ‘어둡고, 더럽고, 무섭다’는 공중화장실의 고정관념을 벗기 위한 개선 사업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프리츠커상 수상자 4명을 포함한 16명의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시부야구에 위치한 17개의 공중화장실을 새롭게 디자인하도록 요청했다.

각 화장실은 일상적인 공공 공간에 대한 설계자의 해석과 장소의 특성을 따라 형태와 재료를 달리한다. 이토 도요는 신사의 입구에 주변 숲에서 자라난 듯한 세 개의 버섯 형태의 화장실을 설계했다. 후미히코 마키는 얇은 곡선 지붕으로 연결된 네 개의 실과 마당 그리고 벤치 휴게 공간을 계획하여, 공중화장실이 공원의 파빌리온 역할을 하도록 했다. 반 시게루는 외벽 전체에 스마트 유리를 사용해, 평소에는 투명하다가 이용자가 문을 잠그면 불투명해지는 화장실을 디자인했다. 이용자는 외부에서도 내부 상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야간에는 실내조명이 등대처럼 공원을 환히 밝힌다.

모두의 일상이 겹치는 화장실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의미는 나이, 장애의 유무, 성 정체성에 상관없이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조성하는 데 있다. 17개의 화장실 모두에 휠체어 공간과 인공 배설관 이용자 시설을 갖춘 실이 한 곳 이상 설치됐다. 또한, 사카쿠라 다케노스케는 남녀 구분 없는 화장실 세 칸을 나란히 배치해 성별에 따른 대기 시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성소수자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후지모토 소우는 서로 다른 높이의 수도꼭지가 설치된 야외 공동 세면대를 정면에 내세워, 다양한 연령대가 물을 사용하는 즐거움을 공유하도록 했다.

프로젝트의 공중화장실들은 모든 이의 일상을 환대하며 존중한다. 이러한 환경은 이용자가 사소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벤더스 감독은 시부야의 공중화장실들을 접한 후 히라야마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의 영감을 자극한 것은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겹치고 짙어지는 단조로운 일상들에 대한 찬미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