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당의 승리가 유력했던 영국 총선이 치러진 7월 4일(이하 현지시각), 런던 증시의 FTSE100 지수는 8241.26으로 전일 대비 70.14포인트(0.86%) 상승했다. 파운드화 환율은 1.276달러로 전날 수준을 유지했다. 파운드화 가치는 지난 1월 이후 달러 대비 1.2% 오르며 주요 통화 중에 가장 강세였다.
7월 5일 확정된 개표 결과, 영국 노동당은 총 650개 하원 의석 중 3분의 2가 넘는 411석을 차지했다.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승리를 능가하는 대승이다. 121석 확보에 그친 보수당은 창당 이래 최악의 참패를 맛봤다.
14년 만에 노동당으로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런던 금융시장이 평온한 이유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사람이 중도 좌파 노동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기업 엘리트와 일반 유권자 모두 집권당에 대한 응징을 원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이후 보수당 정권의 반복된 국정 혼란에 대한 심판이 이뤄졌다는 평가다.
노동당 중도화 성공한 스타머의 실용주의
노동당의 역사적인 총선 승리를 이끌고 새 총리에 오른 키어 스타머(Keir Starmer·62)는 ‘노 드라마 스타머(No Drama Starmer)’ 로 불린다. 복잡한 정치적 드라마나 과도한 퍼포먼스가 없는 스타머의 차분하고 신중한 리더십에 대한 찬사이지만, 격정적인 연설 등 카리스마가 없고, 거창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인기도 높지 않은 정치 스타일을 꼬집는 말이라는 평가도 있다.

1962년 런던에서 공구 제작자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타머는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었지만, 2008~2013년엔 잉글랜드·웨일스 관할 왕립검찰청 청장 재임 시 종이 문서 중심의 형사 사법 절차를 디지털로 전환한 것이 가장 큰 업적으로 주목받았다. 이때의 공로로 2014년 당시 찰스 왕세자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키어 경(Sir Keir)’으로 불린다. 정계 입문 시기도 비교적 늦은 53세로, 2015년 초선 의원이 된 스타머는 5년 뒤인 2020년 노동당 당대표에 올랐다. 노동당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리더였던 제러미 코빈이 선거에 대패한 후 초토화된 당을 재건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당 재건을 위해 그는 실용주의적인 중도화 전략을 구사했다. 철도·우편·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의 재(再)국유화, 부유세·법인세 대폭 인상, 무상교육 확대 등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수정했다. 국유화 정책을 ‘공공서비스 개선을 위한 지속적 투자와 현대화’로 대체했고, 무상교육, 무상 의료 공약도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복지 확대’로 전환했다. ‘노동조합의 권리 강화’라는 당론을 ‘노동자 권리 보호’로 수정하면서 ‘기업 활동을 과도하게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스타머는 거창한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문제를 하나씩 찾아 조율해 가는 식으로 당의 문제를 차근차근 고쳐나갔다”고 전했다.
반면, 2020년 총선 대패 원인이었던 반(反)유대주의 척결에는 과감했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친구’로 표현했던 코빈 전 대표를 2020년 10월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출당 조치했다. 유대인 노동당 당원의 인종차별에 대한 수천 건의 문제 제기를 묵살했던 것이 징계 이유였다. 이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발언 등을 이유로 수백 명을 당에서 쫓아냈다.
브렉시트 후 8년간 국정 혼란 수습 임무
“브렉시트 이후 정치·경제적 혼란의 8년이 지난 지금 영국 유권자는 스타머의 능력으로 국가를 안정시킬 것을 요청했다.”
개표 결과가 확정된 7월 5일 WSJ 기사처럼 스티머는 영국 재건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 실용주의로 4년 만에 노동당 재건에 성공한 스타머의 혁신으로 국정을 안정시킬 것을 유권자는 기대하고 있다. 이날 찰스 3세 국왕 접견 후 스타머 총리는 다우닝가 10번지 관저 앞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영국을 재건할 것이며, 변화의 작업은 즉각 시작된다” 고 말했다.
그러나 스타머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영국 경제는 브렉시트 후 국내총생산(GDP)이 평균 1.3% 성장에 그친 반면, GDP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이 2019년 86%에서 2024년 104%로 올라갈 것으로 전망될 정도로 재정이 악화했다. 이런 이유로 스타머는 공공 주택 확충,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구축, 국민보건서비스(NHS) 개혁 등 국가 재정이 소요되는 공약을 내걸었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세금 인상, 재정 확대 등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상호 모순적인 약속을 한 셈이다. 외교정책에서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유럽과 관계를 개선하겠지만 브렉시트를 되돌리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흙수저·비주류 충신으로 내각 구성
아들 이름을 노동당 정치인 ‘키어 하디’에서 따온 부모의 영향으로 스타머는 청소년기부터 노동당 조직에서 활동했고, 옥스퍼드대 석사과정 중 사회주의 성향 잡지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좌파 성향이다.
7월 5일 발표된 내각 인선은 스타머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내각 이인자인 재무 장관에 영란은행(BOE) 이코노미스트 출신 레이철 리브스(45)를 지명해, 1215년 의회 개원 이후 처음으로 여성을 이 자리에 기용했다. 데이비드 래미(52) 외무 장관은 가이아나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영국 국적 흑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한 인물이다. 영국 정치를 지배한 엘리트 출신보다는 ‘흙수저’나 비주류 출신이 많아 서민 출신인 스타머와 비슷한 궤적을 걸어온 인사들을 기용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25명의 내각 장관 중 11명을 여성으로 임명해, 여성 장관 비율 역대 최고 치를 경신했다.
反극우 ‘공화국 전선’으로 마크롱 기사회생…금융시장 쇼크 지속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의 유럽의회 선거 승리로 촉발된 프랑스 조기 총선이 좌파 연합의 선거 승리로 끝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6월 30일 1차 투표에서 33%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던 RN은 7월 7일 결선투표에서는 총 577석의 하원 의석 중 143석을 얻어 3위 정당에 그쳤다. ‘극우 총리 탄생을 막아야 한다’는 유권자의 ‘공화국 전선’이 발현되고, 중도 집권 여당과 중도 좌파의 후보 단일화가 먹힌 결과다. 집권 여당의 선거 대패로 극우 총리와 동거 정부를 구성할 뻔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기사회생했다.
프랑스 내무부의 개표 집계 결과, 이번 조기 총선의 승자는 1차 득표율 2위였던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이었다. 총 182석을 얻으며 1당으로 등극했다. 1차 투표 득표율 3위로 처졌던 범여권 중도 연합 앙상블은 168석으로 원내 2당 지위는 지켰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한 후보가 없으면 1·2위 후보 및 해당 선거구 등록 유권자의 12.5% 이상 지지를 받은 후보들이 2차 결선을 치르는 프랑스 선거제도가 대반전을 연출한 것이다. NFP와 앙상블 소속 3위 결선 진출자들이 사퇴하는 ‘반(反)극우’ 단일화를 통해 RN 후보들의 의회 진출을 가로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