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는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몇 가지는 변함없는 상수로여겨졌다. 미국과 유럽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양측의 안보 공동체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이런 상수가 변수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나토에서 미국이 탈퇴하면 세계 질서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이런 ‘만약’의 상황이 지난 6월 말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 이후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토론회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고령에 대한 우려를 떨쳐버리고 앞으로 4년 동안 대통령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데 실패했다. 상대적으로 전직 대통령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는 11월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커졌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커져 과거 트럼프의 발언을 곱씹어 보면서 무엇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예측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빠졌다.
트럼프의 안보 공약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국이 나토에서 탈퇴하겠다는 것이었다. 과거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나토 탈퇴가 고려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트럼프가 집권한다면 정말로 미국이 탈퇴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유럽을 경제적 경쟁자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안보를 왜 미국이 떠맡아야 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해 왔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과거의 유물 같은 나토에 왜 발목이 잡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사실 단순하고 명료한 답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유럽을 보호해 줄 정도로 강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
우리는 유럽을 평화롭고 안정적인 곳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는 끝없는 갈등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해 유명인이 된 찰스 린드버그는 1941년 유럽은 영원한 전쟁과 끝없는 문제의 땅이기 때문에 미국은 유럽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유럽은 특정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다양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유럽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경쟁자가 집중된 지리적 조건 탓에 유럽을 끝없는 전쟁의 공간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유럽이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변화한 것은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냉전 때 문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대립을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서유럽을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결정을 했고 이것이 미군의 장기 주둔과 나토 결성으로 이어졌다.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 각국은 과거처럼 서로를 두려워하거나 진의를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런 변화는 상호 협력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유럽의 전후 복구를 위한 마셜플랜을 진행하면서 유럽 국가 간 상호 협력을 강조했다. 유럽 각국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경쟁 대신 협력 기조를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이 상당한 수준의 안보를 책임지면서 유럽은 과도한 군비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복지에 투입할 예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복지 분야에 대한 지출 확대는 극단적인 세력의 고립과 소멸을 유도했다. 중도 진영이 주도하는 안정적인 정치 구조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유럽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은 유럽을 보호해 줄 만큼 강력하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적당히거리를 둔 아주 좋은 존재였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계속 좋았던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럽을 일으켜 세워 미국의 등에서 내려놓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미국 입장에서 보면 유럽이 자신의 몫을 미국에 떠넘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입장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도 계속됐다. 케네디 대통령은 나토 회원국이 공정한 몫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보호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이다.
미국 떠나면 유럽 힘 합쳐 러시아 위협에 대응할 듯
만약 미국이 나토를 떠난다면 유럽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첫 번째 가능한 시나리오는 유럽 국가들이 민주적이고 단결된 힘으로 미국의 공백을 메우면서 러시아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다. 사실 유럽은 이렇게 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국내총생산(GDP)은 러시아의 10배에 이를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서도 미국보다 더 많은 몫을 감당해 왔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의 가장 큰 한계는 유럽이 미국 없이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능력으로 점철된 혼란이었고 결국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상황은 정리되었다. 유럽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수의 이해관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을 조정해서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으며, 안보와 관련해서 각국의 입장 차이도 매우 크다는 점이 유럽에 의한 유럽 방위를 어렵게 하고 있다.
보다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이지 않은 두 번째 시나리오는 유럽이 상호 위협하지도 않지만 서로를 지켜주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유럽 전체 이익을 대변하거나 조정하는 국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이런 상황은 무기력을 넘어서 무정부적인 모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공격적인 러시아, 약탈적인 중국에 더해 유럽에 적대적으로 변화하는 트럼프의 미국까지 더해질 경우, 유럽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안보적인 측면에서 유럽이 방위력을 강화하려면 증세 또는 부채 확대가 필수적이지만 이를 모든 국가가 수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유럽이 처한 안보적 위협은 러시아가 위치한 동쪽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스페인과 동쪽에 있는 폴란드가 동일한 수준의 행동에 나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는 미국이 이들 국가 간 이해 상충의 공백을 메워왔지만, 미국이 없다면 이런 공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유럽 국가 간 갈등 커지면 다시 혼란 발생
가장 우울한 세 번째 시나리오는 유럽 국가 간 갈등과 적대감이 부활하는 상황이다.국내적으로는 극우로 대표되는 극단적 정치 세력이 힘을 더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압력과 간섭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각국은 이에 맞서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고 급진주의적 성향을 확대하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나토에서 떠났다면 등장했을 시나리오지만 미국이 나토에 남기로 했고 오히려 나토를 동쪽으로 확대하면서 30년 동안 유예되었던 시나리오가 이제 현실화하는 것이다.
결국 유럽의 미래는 유럽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폐허밖에 남지 않은 절망적 상황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과거의 전통을 부활시킬 것인지 아니면 분열된 세력 간 갈등으로 다시 혼란과 전쟁으로 점철되는 대륙으로 변화할 것인지는 유럽인의 결정에 달려있다. 트럼프가 던진 질문에 유럽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