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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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는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으로 ‘탄소 가격제(Carbon Pricing)’를 고안했다. 탄소 가격제는 기후변화의 원인 물질인 온실가스에 가격을 매기는 제도다. 즉, 탄소를 많이 배출하면 돈을 지불해야 하고 거꾸로 탄소를 줄이면 돈을 벌 수도 있는 시스템이다. 대표적인 예로 배출권 거래제(ETS·Emission Trading Scheme)가 있다.

배출권 거래제는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권을 할당해 범위 내에서 배출을 허용하되, 부족하거나 남는 배출권은 다른 기업과 거래하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배출권 거래제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미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은 탄소 배출권 거래제 영향권에 살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36개 단위의 탄소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벌써 10년째 배출권 거래제를 운영 중이다.  

국내 탄소 가격 동향

우리나라는 지난 2015년 아시아 최초로 국가 단위의 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했으며, 현재는 3차 계획 기간(2021~2025년)이 진행 중이다. 제도 안착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분명하지만, 배출권 가격이 급등락을 반복하면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2015년 1월 1t당 8000원에 거래가 시작됐던 배출권 가격은 2020년 4월 한때 4만2500원까지 상승했다. 당시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로 기업들의 배출량이 줄어들면서 배출권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해 현재는 1t당 9000원 정도다.

시장안정화조치(MSR·Market Stability Re-serve)

배출권 가격이 예측 불가능하게 큰 폭으로 급등락하면 기업은 경제적 손익을 따져 추가적인 감축 투자를 할지, 배출권을 매매할지 의사 결정을 하기 어려워진다. 이에 배출권 거래제를 운영 중인 국가에서는 시장 안정화 조치(이하 MSR)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의 MSR은 배출권 가격 기반 MSR과 배출권 물량 기반 MSR로 구분할 수 있다. 가격 기반 MSR은 정부가 판매하는 배출권 가격의 상한 또는 하한을 설정하는 방식이다. 물량 기반 MSR은 배출권 시장에서 유통되는 배출권 물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시형 대한상공회의소 탄소중립실 과장 세종대 환경공학 학·석·박사, 현 세종대·카이스트(KAIST) 겸임교수
이시형 대한상공회의소 탄소중립실 과장
세종대 환경공학 학·석·박사, 현 세종대·카이스트(KAIST) 겸임교수

1│EU(유럽연합) 모델

EU의 MSR은 배출권 거래제의 대표적인 시장 안정화 제도로, 배출권 거래 시장의 유통물량(TNAC·Total Number of Allowanc-es in Circulation)을 관찰해 배출권 공급량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시장에 유통되는 배출권 물량은 1년 배출권 할당량의 22~45% 수준인 4억~8억3300만t 범위에서 유지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장의 배출권 유통 물량이 4억 t 이하로 떨어지면 정부가 보유한 예비분을 추가로 공급하고, 8억3300만t 이상 올라가면 다음 연도에 기업에 할당되는 배출권을 삭감한다. EU의 MSR은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기업이 필요하면 언제든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 구매 경쟁 가열로 인한 가격 급등을 방지할 수 있다. 

2│미국(캘리포니아주)모델

미국 캘리포니아주 배출권 거래제의 경우, 정부가 판매하는 배출권의 가격 범위(상한과 하한)를 사전에 설정하고 있다. 하한 가격은 2012년 10달러에서 시작하여 매년 물가 상승률, 이자율 등을 고려해 5%씩 인상하고, 상한 가격은 3단계로 40, 45, 50달러에 설정해 매년 5%씩 인상하고 있다. 

배출권 시장가격이 단계별 상한 가격보다 높아질 경우 해당 단계의 상한 가격으로 배출권을 살 수 있다. 상한 가격은 기업의 ‘심리적 안정장치’ 역할을 하면서 배출권 가격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3│뉴질랜드 모델

뉴질랜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배출권 가격과 별도로 정부가 판매하는 배출권의 상한 가격을 사전에 제시하고 있다. 기업이 배출권 구매가 필요한 경우 시장에서 구매할지, 정부 판매분을 살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준다는 의미다. 정부가 정한 상한 가격은 시장가격 안정화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기업은 상한 가격으로 배출권 정산이 가능해 배출권 거래제 이행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선호하고 있다.

2022년 11월 24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제16차 배출권 할당위원회가 열렸다.  사진 뉴스1
2022년 11월 24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제16차 배출권 할당위원회가 열렸다. 사진 뉴스1

시사점

정부가 판매하는 배출권의 가격 범위를 사전에 설정하는 ‘미국 방식’은 배출권 시장가격의 예측 가능성을 키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나 탄소 가격의 상·하한 가격에 대한 사회적합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된다. 배출권 가격 설정이 어려운 국내 여건을 고려할 때 배출권 시장 여유분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EU 모델’을 도입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배출권 여유분이 부족한 만큼 적정 유통량에 대한 기준 수립이 필요하다. 정부가 보유 중인 배출권 예비분을 활용해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며 전기 계획 기간 남은 잔여 배출권 예비분은 폐기하지 않고 이월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규제 대응 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위해 ‘뉴질랜드 방식’의 상한 가격 옵션도 도입을 검토해 볼 만하다. 이는 중소기업의 행정 부담을 완화해 주는 동시에 배출권 정산 시점 가격 급등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과거 한국 배출권 시장에 배출권이 유통되지 않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지금 배출권을 팔면, 정작 필요할 때 살 수 없다’는 기업들의 불안 심리 때문이었다. 만약 유럽과 같은 물량 기반의 시장 안정화 조치가 도입된다면 ‘언제든 배출권이 필요할 때 구매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장치’ 역할을 할 것이며, 이를 통해 배출권 여유 기업의 배출권 판매 유도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시형 대한상공회의소 탄소중립실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