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야경과 샴페인. 사진 김상미
서울 야경과 샴페인. 사진 김상미

무더운 여름, 시원한 스파클링와인 한 잔은 낭만이자 힐링이다. 하지만 막상 무엇을 살지 고르다 보면 난감할 때가 많다. 저렴한 것부터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비싼 것까지 종류가 너무 많아서다. 높은 가격대는 주로 샴페인이 차지한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샴페인은 유독 더 비싼 걸까. 단순히 유명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애호가들은 샴페인의 부드러운 질감과 꿀, 견과, 토스트 등의 복합 미가 어떤 스파클링와인도 따라잡을 수 없는 오묘한 맛이라고 극찬한다. 그런 맛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진 각 사.
사진 각 사.

샴페인만의 특징 '2차 발효'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방에서 만든 스파클링와인이다. 완성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로 악명 높은 샴페인은 포도즙을 한 번 발효해서 만드는 일반 와인과 달리 두 번의 발효를 거친다. 첫 번째 발효는 기본 와인을 만들 때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세심함을 발휘할수록 샴페인의 품질은 좋아진다. 주재료인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를 품종별로 따로 발효하는 것은 기본이고, 밭별로도 구분해서 만들어야 한다. 밭의 위치에 따라 미기후(微氣候)와 토질이 달라서 같은 품종도 맛에서 미묘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분해서 발효한 와인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기본 와인을 만드는데, 여기에는 지난 몇 년간 만들어서 보관해 둔 리저브 와인도 들어간다. 해마다 포도 맛이 조금씩 달라서 한 해의 포도로만 만들면 와인 맛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빈티지마다 다른 맛을 보여주는 일반 와인과 달리 샴페인은 브랜드별로 특화된 맛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대부분의 샴페인은 여러 해의 와인을 섞어 논 빈지티(NV·Non-Vintage)로 만들고 레이블에 생산 연도를 기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엣 샹동(Moët& Chandon)과 뵈브 클리코(Veuve-Clicquot)가 늘 일관된 맛을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 와인의 블렌드가 끝나면 이것을 병에 담고 효모와 당분을 추가한다. 병 속에서 두 번째 발효를 일으켜 이산화탄소를 생성시키기 위해서다. 이때 병 입구를 코르크나 알루미늄 뚜껑으로 단단히 봉인해 이산화탄소가 날아가지 않고 와인에 녹아들도록 한다. 봉인한 병은 가로로 눕혀 어두운 동굴 속 깊숙한 곳에 켜켜이 쌓아 둔다.

떼땅져의 샴페인 숙성 동굴. 사진 김상미
떼땅져의 샴페인 숙성 동굴. 사진 김상미

고대 동굴, 샴페인의 숙성에 최적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해마다 생산되는 샴페인은 무려 3억 병이나 된다. 그 많은 병이 다 들어갈 동굴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잠시 2000년 전 과거로 돌아가 보자. 로마가 한창 서유럽을 정벌할 때 일이다. 샹파뉴도 로마의 식민지 중 하나였다. 샹파뉴가 거대한 석회암 지대 위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안 로마는 땅속에서 석회암을 캐내 열심히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튼튼하고 부드러워서 가공하기 쉬운 석회암이야말로 훌륭한 건축 자재였기 때문이다. 이때 파낸 지하 동굴의 길이가 무려 200㎞에 달한다. 매년 생산되는 샴페인을 보관하기에 충분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항온과 항습을 유지하므로와인 숙성에 최적의 조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방공호로 이용됐고 당시의 낙서도 남아 있다. 샹파뉴로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샴페인 숙성 동굴을 방문해 보기 바란다. 고대인이 만든 동굴 속에서 줄지어 익어가는 샴페인의 모습이 사뭇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포 생성이 끝난 샴페인은 눕힌 상태 그대로 숙성에 들어간다. 발효를 끝낸 효모는 앙금이 되어 병의 측면 바닥에 가라앉는데 이때부터 자연의 신비가 작용해 샴페인 고유의 맛을 만들어낸다. 죽은 효모의 세포가 스스로를 잘게 분해하면서 샴페인의 질감을 크림처럼 부드럽게 만들고, 갓 구운 토스트와 비스킷 같은 구수한 풍미를 와인에 부여한다. 워낙 느리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깊고 풍부한 맛을 추구하는 프리미엄급 샴페인일수록 긴 숙성이 필수다.

모엣 샹동이 만드는 명품 샴페인 돔 페리뇽(Dom Pérignon)은 7년 이상 숙성을 거쳐 출시되는 빈티지 샴페인이다. 빈티지 샴페인은 포도 작황이 뛰어난 해에만 특별히 생산되는 와인이다. 맛을 보면 농익은 과일 향과 토스트, 견과 등 화려한 아로마가 코와 입을 사로잡는다. 크리스탈(Cristal)은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의 빈티지 샴페인으로 숙성 기간이 최소 6년이다. 샤르도네 40%와 피노 누아 60%를 블랜드해 만드는 이 와인은 질감이 실크처럼 매끄럽다. 레몬, 자몽, 복숭아 등 풍부한 과일 향과 은은한 미네랄 풍미가 우아함을 뽐낸다. 떼땅져(Taittinger)의콩테 드 샹파뉴(Comtes de Champagne)는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100% 샤르도네) 빈티지 샴페인이다. 8~10년간 숙성되는 이 와인은 신선한 과일과 은은한 꽃 향이 가득해 섬세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애호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폴 로저(Pol Roger)가 만드는 서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l)도 10년 이상 숙성을 거친 빈티지 샴페인이다. 처칠이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던 샴페인 맛을 그대로 재현한 이 와인은 보디감이 강건하다. 감미로운 과일 향과 견과, 브리오슈 등 풍성한 풍미가 입안을 꽉 채운다. 크룩(Krug)의 그랑 퀴베(Grande Cuvée)는 10년 이상 각기 다른 해에 생산된 120여 종의 와인을 블렌드한 뒤 7년 이상 숙성을 거쳐 출시하는 샴페인이다. 달콤한 과일 향과 꿀, 견과, 토스트 등 다채로운 풍미가 부드러운 질감과 어우러져 복합 미의 진수를 보여준다. 샴페인의 깊고 오묘한 맛은 자연이 내어준 포도, 인간의 노고, 긴 숙성 시간, 고대인이 파놓은 석회암 동굴 등의 아름다운 조합이다. 상반기를 마무리하며 수고한 나에게 맛있는 샴페인 한 병 선물할까 싶다. 매일 쌓아가는 나의 노력과 시간도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보기 바라며.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