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유럽 반도체법, 그린 딜 산업 계획 등으로 대표되는 산업 정책이 세계 주요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자국의 핵심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기업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고 있으며,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무역 장벽을 세우고 있다. 산업 정책의 역사는 15세기부터 시작된다. 정부가 직접 기업의 수출을 돕고 외국 기업의 수입을 제한하는 기조가 수 세기 동안 대세를 차지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 역시 경제개발오개년계획이라는 산업 정책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시장주의가 떠오르면서 시장은 점차 개방됐고, 자국 기업에만 이득이 되는 관세정책과 보조금 정책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제재 대상이 됐다.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과 전쟁 위기로 세계 공급망에 불확실성이라는 먹구름이 드리우자, 각국에서 산업 정책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국 전략 산업의 생산 역량을 스스로 갖춰야만 외부 환경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연구에 따르면, 국제 통상 관련 정부 정책 중 산업 정책으로 분류되는 정책은 2010년 34건(8%)에서 2021년 1594건(48%)으로 급증했다. 2023년엔 전 세계에서 2000여 개의 산업 정책이 발표됐다고 한다. 전문가는 산업 정책의 시대가 단기간에 저물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필자는 각국의 정책 책임자가 산업 정책을 기존의 경제정책과 구분되는 별개의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산업 정책을 경제정책과 분리해 연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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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등한시되던 산업 정책이 다시 세계경제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탈세계화에 대한 두려움, 다극화(multipolar·세력의 중심이 여러 갈래로 나뉨)된 세계 질서, 공급망 붕괴, 경제 민족주의 부활, 무역 긴장(미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 간 무역 긴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산업 정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베트남,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모두 산업 정책 청사진을 발표했다. 그러나 산업 정책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지식인과 정책 책임자는 산업 정책의 정확한 의미와 구체적인 수단을 다른 경제정책과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산업 정책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이를 폄하하는 경제학자도 마찬가지다. 1791년 미국의 초대 재무 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유명 보고서에서 산업 정책을 제조업과 소위 ‘생산적’ 부문을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 조치로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지난 2세기 동안 경제 변화와 제조업을 넘어서는 사고의 필요성을 반영해 진화하고 확장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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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①산업 정책이라는 용어는 보조금과 세제 혜택부터 공공 조달, 지식재산권 보호 설계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경제활동 구조의 변화를 꾀하는’ 모든 정부 개입을 포괄한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정 산업군을 겨냥하는 ‘수직적’ 산업 정책과 모든 산업과 기업의 비즈니스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춘 ‘수평적’ 경제정책을 구분하고 있다. 수평적 접근 방식(경제정책)을 공정하며,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통념은 정부의 적절한 개입 범위에 대한 잘못된 합의를 반영하고 있다. 산업 정책과 경제정책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정부의 개입을 ‘좋음(모든 산업에 영향)’과 ‘나쁨(특정 산업을 겨냥)’으로 나누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 국가 예산의 거의 모든 항목은 암묵적 또는 명시적으로 특정 지역, 산업군 또는 기업을 겨냥한다. 따라서 국가 예산이 드는 거의 모든 정책은 산업 정책으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인프라를 구축하는 결정은 언제나 특정 지역과 기업에 (불공정한) 혜택을 제공한다. 산업 정책의 대척점으로 여겨지는 거시적인 금융정책도 사실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 환율 정책은 일부 산업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다. 보조금을 직접 지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우회해 산업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은행권이 대표적이다. 정부 산하기관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시중은행에 1%의 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은행은 이 금리로 (같은 정부로부터) 국채를 매입해 약 4%의 수익을 창출한다. 이는 매년 약 300억달러(약 41조415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과 같은데, 개발도상국이 한 산업에 지급하는 보조금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정책은 항상 한 나라의 경제구조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셀레스탱 몽가
세계은행(WB)
선임 경제고문
전 아프리카개발그룹
부사장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유엔산업개발기구 전무이사
예를 들어, 빈곤 완화를 위한 사회 안전망 정책과 불평등 개선을 위한 누진 소득세는 경제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특정 지역이나 사회 집단 내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또, 곳간이 넉넉지 않은 국가에서는 특정 산업이나 지역을 지원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 ‘수평적’이고 ‘중립적’이며 ‘선한’ 사회 프로그램이 공공 부채를 증가시키고 금융 안정에 위험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해를 끼친다면, 그 영향으로 경제구조가 바뀔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산업 정책의 효과를 경제정책 효과와 분리해 연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두 정책 모두 산업과 기업에 눈에 보이는 효과를 직접적으로 미치며, 그 밖의 다양한 경제 주체에도 간접적인 효과를 미쳐 언제나 경제 전반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결과를 분리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잡음만 낳을 것이다. 거의 모든 경제정책은 경제구조를 개선하거나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일부 산업 또는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유리한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② 몰리에르의 ‘서민귀족(The Bourgeois Gentleman)’에서 무슈 주르댕이 자신도 모르게 평생 산문을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경제학자는 결국 거의 모든 경제정책이 사실은 산업 정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TIP
①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가 운영하는 정책 포털 VOXeu는 2023년 12월 4일(현지시각) 공개한 ‘산업 정책의 새로운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산업 정책을 ‘공공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경제활동 구조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정부 정책’으로 정의했다. VOXeu에 따르면, 산업 정책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철강, 자동차, 조선 또는 반도체 등 한 국가의 주력 산업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에서 나아가 연구개발(R&D) 또는 수출에 대한 지원도 포함한다. VOXeu는 아시아, 특히 한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일군 산업 정책을 근현대 경제 발전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는다. 산업 정책은 역사적으로 산업화 촉진을 목표로 했지만, 오늘날에는 기후 위기 대응, 양질의 일자리 창출, 공급망 확보, 국가 안보 등을 목표로 삼는다.
VOXeu는 “인프라 투자와 반도체 산업 개발 등을 위한 미국 정부의 정책은 ‘산업 정책’을 논의의 전면에 내세웠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산업 정책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산업 정책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는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② 루이 14세가 군림하던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겸 연출자이자 연기자였던 몰리에르(1622~73년)는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와 함께 오페라와 발레, 연극을 결합한 ‘발레 희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공연을궁정에서 선보였다.
몰리에르는 서양 문학의 가장 위대한 희극 작가 중한 명으로, 17세기 프랑스 3대 극작가에 꼽힌다. ‘서민귀족’은 그의 발레 희극 대표작으로, ‘벼락부자’가 된 평민 무슈 주르댕이 귀족 생활을 배우며 벌어지는해프닝을 통해 왕족과 귀족의 위선을 풍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