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가득 하얀 눈보라다. 허공과 대지가 나뉘지 않은 천지창조 이전의 세상 같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이 분간되지 않는 혼돈, 선도 악도 뒤엉켜 있는 날씨다. 새 한 마리가 공간과 시간을 가르며 날아오르자, 저 멀리 희미하게 두 개의 전조등을 켜고 다가오는 자동차가 보인다. 비로소 상하좌우가 나뉘고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도로와 벌판의 경계가 드러난다.
장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판매회사에서 영업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제리가 주 경계를 넘어 파고까지 달려가는 중이다. ‘어쩌다 그 많은 빚을 졌을까. 장인이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이런 짓까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제리는 원망한다. 잘될까, 걱정하면서도 이번 일만 잘 풀리면 그의 인생도 성공의 기지개를 켜리라 확신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선을 넘기로 한다.
제리는 칼과 게이어에게 아내의 납치를 의뢰한다. 회사에서 몰래 빼낸 자동차와 장인에게서 몸값으로 받을 8만달러 중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장인에게는 납치범이 100만달러를 요구한다고 말할 작정이다. 장인은 기꺼이 돈을 내줄 테고 아내는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돈을 손에 쥐면 빚을 갚고 지긋지긋한 영업소를 때려치우고 폼나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제리가 생각하기에 계획은 완전했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었다. 장인이 돈을 좀 잃겠지만 그 정도 손실은 곧 회복할 게 분명했다. 따지고 보면 그 돈도 하나밖에 없는 사위의 주머니로 옮겨오는 것이니 궁극적으로는 딸과 손자를 위한 것, 손해도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가 잠시 겁을 먹고 사춘기 아들이 좀 놀라겠지만 그들은 더 풍족해질 터였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쉬울까. 사람들이 내 뜻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삶이 얼마나 신날까. 아내는 ‘무사히’ 납치된다. 하지만 그 뒤부터 제리의 예상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동업자라던 납치범들은 손발이 맞지 않았고 사사건건 으르렁대며 싸웠다. 상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그들이 살인범으로 돌변한 것은 제리가 상상 못 한 최악의 변수였다.
장인의 대응도 제리의 기대를 크게 벗어난다. 새로운 사업기획안을 상의하고 투자를 부탁하면 “내가 은행이냐, 왜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달라느냐”고 무시하고는 아이디어를 빼앗는 장인이었다. 아무리 납치범의 요구라 해도 100만달러나 되는 거금을 미덥지 못한 사위에게 선뜻 건네줄 거라고 낙관한 것은 어리석고도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들이 아내를 해칠 거라고 겁을 주고서야 경찰에 연락하겠다는 걸 겨우 말렸지만, 장인은 자신이 직접 납치범을 상대하겠다고 나선다. 칼과 게이어도 위험 보수를 더 주지 않으면 정말로 제리의 아내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다. 납치에 쓰라고 준 새 자동차는 정식 번호판이 없다는 이유로 검문당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경찰이 찾아올 것도 제리는예상하지 못했다.
제리의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몰랐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계산만 앞섰지, 타인들도 저마다 원하는 게 있고 그 목적을 위해 이기적으로 따지고 행동한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쉽고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납치 자작극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굴러와 제리를 부수고 파묻으려 하고 있었다.
어둠이 짙은 새벽, 사건을 알리는 요란한 전화벨이 마지의 단잠을 깨운다. 그녀는 남편이 차려준 이른 아침을 먹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밤새 내린 폭설과 자욱한 안개로 앞이 잘 보이진 않지만, 그녀가 달려가는 길은 제리의 세계와는 달리 땅과 하늘,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의 구분이 뚜렷하다. 누군가에겐 불평거리밖에 되지 않는 겨울 추위가 마지에게는 새롭게 시작되는 소중한 하루의 일부다.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인데도 마지는 칼과 게이어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 현장을 담담히 마주한다. 범인들이 남긴 단서들은 고맙게도 눈밭에 선명히 남아 있다. 마지는 작은 실마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건의 실체를 영리하게 추리하고 냉정하게 분석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칼과 게이어, 제리를 향해 다가간다.
어리석은 납치극은 피비린내 나는 연쇄 살인 사건으로 끝이 난다. 범인들을 체포하고 사건을 해결한 밤, 마지는 남편과 함께 따뜻한 침실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남편은 우표 도안 공모전에서 3센트짜리에 당선됐다고 말한다. 잘 쓰이지 않는 우표라며 실망하는 남편에게 마지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소중하게 쓰일 거라며 진심으로 축하한다. “당신이 자랑스러워. 우린 잘하고 있는 거야.” 마지는 알고 있다. 인생엔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것을.
선과 악은 명확하게 나뉘어 있지 않다. 필요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며 거짓말하고 자기를 변호하며 너와 나를 가르고 유리와 불리,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환경이 선과 악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처해도 모든 인간이 남을 원망하고 납치극을 벌이고 살인자가 되기를 선택하진 않는다.
코엔 형제가 만든 ‘파고(Fargo)’는 칸 영화제 감독상,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파고는 제리가 납치범들을 만난 술집이 있던 도시의 이름이지만 far go, 즉 ‘너무 멀리 갔다’는 의미로 영화의 주제와도 상통한다.
과하지 않은 것, 너무 멀리 가지 않는 것이 평범이다. 금을 넘을 수는 있지만 넘지 않는 것,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과 혼돈 속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일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구분하는 것, 손해 본다고 해서 착한 마음을 내던지지 않는 것. 평범은 쉽지 않다. 영화가 끝나고도 마음에 오래 남는 마지의 미소처럼, 그래서 평범은 평온하고 아름답고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