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후보직 사퇴가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민주당에 전화위복이 될까.
때 이른 감이 있지만, 바이든이 7월 21일(이하 현지시각) 공개서한을 통해 사퇴를 선언한 이후 불과 며칠 동안의 상황 전개를 보면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중심으로 민주당 지지층이 똘똘 뭉치면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로 기울던 선거 판세가 다시 출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으로서는 대선을 석 달여 남긴 시점에 최대 불안 요인이었던 바이든의 ‘고령 리스크’를 떨쳐버리고(대통령으로서 바이든의 공과와는 무관한 얘기다) 트럼프보다 열여덟 살 어리고, 바이든 임기 내내 국정 운영을 보좌한 해리스를 중심으로 진영을 재정비할 수 있게 됐다. ‘고령 리스크’ 화살은 이제 올해 78세인 트럼프를 향하게 됐다.
사퇴 타이밍도 절묘했다. 대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민주 진영의 잠룡들이 난립하면서 혼란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누가 후보로 나서건 ‘준비가 부족한 후보’라는 트럼프의 집요한 공격을 이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후보 선출 과정의 혼란도 트럼프 공격 옵션만 다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결국 큰 이변이 없는 한 해리스가 후보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민주 진영의 ‘컨벤션 효과(정치 이벤트 직후 지지율 상승 현상)’가 커지면서 해리스는 후원금과 지지율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하루 기준 미 대선 사상 최고액 모금
민주당은 바이든이 대선 후보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7월 21일 오후부터 23일까지 2억5000만달러(약 3470억원)가 넘는 후원금을 모금했다. 해리스 캠프 측은 이 기간에 140만 명의 후원자가 1억2600만달러(약 1479억원) 이상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 사퇴 발표 후 24시간 동안 모인 후원금만 8100만달러(약 1124억원)로, 미 대선 사상 하루 기준 최고액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지율에서는 트럼프와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벌이고 있다.
CNN이 7월 22~23일 이틀간 여론조사 기관 SSRS를 통해 온라인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트럼프와 해리스의 대선 가상 대결 지지율이 49% 대 46%로 트럼프가 3%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7월 23일 나온 로이터통신과 입소스의 여론조사에서는 해리스가 트럼프를 44% 대 42%로 2%포인트 리드했다.
오랫동안 바이든을 염두에 두고 대선을 준비한 트럼프 진영은 오히려 당혹스러운 상황이 됐다. 바이든과는 연령대와 성별, 피부색등 비슷할 게 없는 해리스를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및 J.D. 밴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 둘 다 백인 남성인 반면, 해리스는 아프리카·아시아계라 점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전망한다. 흑인,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 지지가 2020년보다 줄어든 것이 그동안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상대적으로열세를 보였던 이유 중 하나로 지목받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주 법무 장관 겸 검찰총장을 지낸 해리스가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를 겨냥해 공세를 본격화한 것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네 차례 형사 기소됐고, ‘성 추문 입막음 돈 지급’ 사건에서 유죄 평결을 받은 바 있다.
해리스는 7월 22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열린 선대본부 연설에서 “(검사 시절) 모든 종류의 범죄자를 상대해 봤다”면서 여성을 학대하는 포식자, 소비자를 뜯어먹는 사기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어기는 협잡꾼 등 “트럼프 같은 유형을 잘 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녀(해리스)와 토론하기를 원한다”면서 “그들(바이든과 해리스)의 정책은 똑같기 때문에 그녀도 (나와 토론하고 나면) 별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2020 대선 때는 ‘바이든 저격수’ 이름 날려
해리스는 1964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자메이카 출신인 부친, 인도 브라만(인도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 최고 계급) 가문 출신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멀라’란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연꽃’이란 뜻이다. 부친은 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를 지냈고, 모친은 과학자였다.
해리스는 박사 학위를 받고 유방암을 연구하던 모친 직장을 따라 캐나다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워싱턴 D.C.의 유서 깊은 흑인 대학인 하워드대에 진학해 정치학·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립대 헤이스팅스 로스쿨을 졸업한 뒤 1990년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39세 때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에 출마해 당선됐고, 46세에 법무 장관이 됐다. 2016년 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직에 도전했는데 같은 당 소속 현역 하원의원을 누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흑인 여성으로는 캐럴 브라운에 이어 두 번째 상원 입성이었다. 2020년 대선 경선에선 ‘바이든 저격수’로 이름을 알렸고, 바이든은 8월 전당대회에서 해리스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이듬해 1월 바이든 정부 출범과 함께 미국 첫 여성·유색인종 부통령이 됐다.
날카로운 언변과 소수 인종·여성으로 미국 비주류 사회에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부통령 재임 중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력의 대부분이 법 집행 분야에 걸쳐 있는 만큼 바이든에 비해 외교 분야 경력이 많지 않다는 것도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해리스는 2014년 동갑내기 백인 변호사인 더글러스 엠호프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고 이전 결혼에서 얻은 딸이 둘 있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해리스는 2021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접견하면서, 문 대통령과 악수하자마자 바지에 손을 닦아 ‘외교 결례’ 논란에 휘말린 바 있다.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는 당시 해리스가 코로나19에 대한 분명한 우려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듬해 9월에는 해리스가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을 접견했다. 현직 미 부통령이 한국을 찾은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 2018년 2월 마이크 펜스 부통령 방한 이후 4년 6개월 만이었다.
민주당의 새 대선 후보는 8월 1~8일 열리는 온라인 투표 또는 8월 19~22일 시카고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결정된다. 두 경우 모두 유권자를 대표하는 대의원이 투표에 참여한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미 대의원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며 다른 예비 후보는 아직 나서지 않았다.
해리스 러닝메이트 물망 오른 3인의 ‘경합 州 백인 남성’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이 유력해지면서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가 누가 될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민주당 상원의원과 주 검찰총장 등을 지낸 인도계 흑인 여성이란 해리스 부통령의 정체성을 보완하기 위해 경합 주(스윙 스테이트)의 표심을 자극할 수 있는 백인 남성이 지명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민주당 주요 후원자를 인용해 “해리스 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조시 셔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마크 켈리 상원의원(애리조나주), 로이 쿠퍼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고 7월 23일 보도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경합 주가 정치적 텃밭인 백인 남성이란 점이다. 유대계인 셔피로 주지사는 2022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더그 마스트리아노 후보를 15%포인트 차로 누르고 정계 샛별로 떠올랐다.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과 주 법무 장관을 거쳤다.
애리조나주에서 정치 경력을 쌓은 켈리 의원은 총기 규제를 주도하다 2011년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총에 맞아 숨질 뻔했던 개비 기퍼즈 전 하원의원의 남편이다. 트럼프 후보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으로 관심이 모아지는 총기 규제 이슈를 다시 민주당 의제로 부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노스캐롤라이나주 토박이인 쿠퍼 주지사 역시 주 상원의원과 법무 장관을 거쳤다. 2016·2020년 트럼프 후보가 승리했던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연거푸 주지사로 선출됐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FT는 이 밖에 ‘40대 젊은 피’ 앤디 베시어 켄터키 주지사와 하이엇 가문 갑부 정치인 J.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 팀 왈츠 미네소타 주지사, 그레천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 등이 후보 명단에 올라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