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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은행(bank)의 어원은 영국 런던의 고리대금업자들이 템스강변의 둑(bank)에서 장사를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에서부터, 14세기 유럽의 환전상들이 거리의 벤치(bench)에 앉아 돈놀이를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영어 뱅크(bank)는 ‘수평으로 늘어선 배의 노’를 의미하는 바이킹어 바키(bakki)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바이킹이 영국과 프랑스에 진출하면서 바키는 벤치(bench)와 방크(banc)로 바뀌고 그 의미도 ‘일렬로 늘어선 사물의 집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직관적으로 와닿는 설명은 아니다. 

고리대금업과 신용 위험

은행업에 대한 기록은 14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신용(채무)에 대한 관념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만큼 독창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15세기 중엽 서아프리카 감비아에 도착한 항해 왕 엔히크 왕자는 금을 찾는 데 실패하자 아프리카인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노예무역을 구상한다. 엔히크의 새로운 사업은 이미 유럽에서 오랜 기간 노예무역의 관행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전의 유럽인이 전쟁과 약탈을 통해 다른 유럽인을 노예로 삼았다면, 엔히크는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사용했다는 점이 다르다. 엔히크의 독창성은 기존 유럽 노예가 외모만으로는 자유민과 구분이 힘들어 도망쳤을 때 추적이 힘들지만, 아프리카인은 외모에서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관리가 수월하다는 점에 있었다.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slave)는 원래 슬라브 지역 사람(Slav)을 의미했다.

르네상스로 인해 중세가 쇠퇴하고 근세, 즉 새로운 시대(neuzeit)가 도래했다. 르네상스란 14세기 유럽에서 교황권의 약화, 흑사병의 만연,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변화를 의미한다. 13세기 십자군 운동을 통해 유럽 내 교역망이 구축됨에 따라 14세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이탈리아에서는 바르디(Bardi), 페루치(Peruzzi) 등 금융 가문이 탄생하였고, 이들은 유럽의 금융을 장악했다. 하지만 바르디와 페루치는 1340년대 주 고객이던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국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별개의 국가였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가 죽자, 매제인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를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서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를 침략하여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3세는 크래시, 푸아티에, 아키텐 등 여러 곳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잉글랜드 국왕의 군사적 사업의 실패는 이탈리아 은행 사업의 붕괴로 이어졌다. 채무자(국왕)가 거액의 사업 자금을 빌려 벤처 사업(전쟁)을 일으켰으나 부도가 나자 은행이 부실해져서 망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거액여신규제, 동일인여신규제 등 같은 신용 위험 통제 장치가 있었더라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서 은행이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메디치와 콜레오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가문은 없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 두 명(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프랑스 왕비 두 명(카테리나, 마리아), 공작 세 명을 배출했다. ‘군주론(Il Principe)’을 쓴 당대 최고의 정치 이론가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의 주문을 받고 이들의 역사를 정리한 ‘피렌체 역사(Istorie Fiorentine)’를 남겼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도 1390년대까지는 은행가라기보다는 폭력배에 가까웠다. 가문이 미천했기 때문에 주로 영세한 시장 상인이나 서민 상대로 고리대금을 일삼던 폭력배였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광장에서 공개 처형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명화 ‘대부’에는 시칠리아 출신 미국 이민자 비토 콜레오네(말런 브랜도)가 뉴욕에서 만든 마피아 조직을 그의 막내아들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가 넘겨받으면서 합법적 사업체로 변신하는 내용이 나온다. 메디치 가문에서도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지역의 폭력배 집단을 합법적인 은행가로 변신시킨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조반니 메디치다. 조반니의 목표는메디치 가문의 정통성을 쌓는 것이었다. 그는 각고의 노력, 검소한 생활,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조반니 메디치는 1385년 그의 친척이 운영하던 은행 경리로 시작하지만, 치밀한 성격 덕분에 곧 로마의 환전상 시장에서 명성을 얻는다. 당시 로마는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성당에서 바티칸으로 보내온 성금과 유럽 각지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몰려든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주화가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바티칸 교황청은 금고에 넘쳐나는 주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모든 영주가 독자적으로 화폐 발행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형태, 중량, 순도의 온갖 종류 주화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교황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장거리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과 세금을 징수하는 행정 당국도 환전 절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오늘날의 환전업은 자국 종이(지폐)를 외국 종이(지폐)와 교환하는 업무를 의미하지만, 당시의 환전업은 다양한 중량과 순도의 금화와 은화를 정확히 계측하여 순수한 금, 은으로 교환해 주는 업무를 의미했다. 

시뇨리지와 화폐 변조

미국 워싱턴 D.C.에는 ‘내셔널 갤러리’라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1937년 은행 재벌 앤드루 멜런이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서면 앤드루 멜런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에서 갈릴레오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학문 전 분야에 걸친 후원사업을 했다. 메디치 가문이 이룩한 눈부신 건축 유산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인을 피렌체로 끌어모은다. 산마르코 대성당, 산로렌조성당, 베키오 궁전, 우피치 미술관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호화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초기 메디치 은행은 시골 우체국처럼 작은 점포에 불과했다. 메디치 은행은 피렌체의 양모 시장에 거점을 두었다. 당시 피렌체 양모 산업은 유럽 전역을 석권하고 있었다. 양모는 겨울이 길고 추운 북유럽 지역에서는 매우 귀중한 고가의 필수품이었다. 또한 유럽은 분권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영주가 독자적으로 화폐(금화·은화)를 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권화된 화폐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럽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화폐의 순도 문제였다. 대부분의 영주는 화폐의 순도를 속임으로써 시뇨리지(화폐 주조 차익)를 남기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이 5만원권을 발행하는데 종잇값과 인쇄 비용을 합하여 200원이 든다면, 한국은행은 5만원권 1장당 4만9800원의 시뇨리지를 얻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복잡한 화폐 체계에서는 귀금속 전문가인 환전상만이 화폐의 정확한 내재 가치를 측정할 수 있었다. 

둘째는 화폐 변조다. 형법에서는 화폐 변조를 ‘화폐 발행 권한 없는 자가 화폐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그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5만원권을 반으로 찢으면 2만5000원 또는 그 이하로 가치가 떨어질까. 5만원권에 볼펜으로 3만원이라고 쓰면 3만원으로 가치가 떨어질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변조’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금속화폐를 사용하던 시절 주화의 테두리를 깎거나 긁어내어 금가루, 은가루를 훔치는 수법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