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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유럽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격변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중세의 봉건제가 무너지고 프랑스를 필두로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출현했고, 경제적으로는 십자군 원정로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국제적 유통망이 형성됐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회가 분열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교황이 난립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대격변의 한가운데에 프랑스의 ‘미남(美男)왕’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이하 필리프)가 있었다. 그는 냉혹한 성격 때문에 그의 정적(政敵)뿐만 아니라 친구조차 그를 ‘철의 왕(le Roi de fer)’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실존 모델을 이탈리아 피렌체의 체자레 보르지아라고 말하고 있지만, 잔인함과 냉혹함 면에서 체자레 보르지아는 결코 필리프를 따라올 수 없었다. 그의 정적이었던 파미에르 주교는 “그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는 영혼 없는 조각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국가의 탄생

독일의 정치철학자들은 ‘국가(Staat)’라는 명칭을 매우 제한적으로 쓴다. 국가는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와 중세의정치체제를 국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국가의 세 가지 구성 요소는 국가 인민(Sta-atsvolk), 국가 영토(Staatsgebiet), 국가 권력(Staatsgewalt)이다. 이것을 일상용어로 바꾸면 각각 국민, 영토, 주권에 해당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단일, 불가분, 불가양의 절대적 권력인 주권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예수-바울-교황(바울의 후계자들)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필리프가 나타나면서 주권 개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리프는 봉건 귀족과 성직자의 부와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기욤 드 노가레, 앙게랑 드 마리니 등 유능한 행정가를 중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이묘(군벌)의 군사력을 소진하기 위해 이들을 임진왜란에 밀어 넣었듯, 필리프는 자신의 가신(家臣)들을 영국과 전쟁에 몰아넣었다. 필리프는 법과 계약을 이용해 귀족의 봉건적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프랑스가 지방분권적인 봉건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변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당시 프랑스 서부 지역은 영국 영토였고, 프랑스 왕은 북부의 일 드 프랑스(파리 지역)만을 직할지로 다스리는 실속 없는 군주였다. 필리프는 나바르의 여왕 조안과 결혼함으로써 피레네산맥 이북의 나바르, 프랑스 동부의 샴페인 산지로 유명한 비옥한 샹파뉴, 치즈로 유명한 브리 지역을 얻을 수 있었다. 필리프는 군주제를 강화하고 자신의 명령을 프랑스 전역에 관철하기 위해 전문적 관료를 중용하였고, 감사원을 만들어 감찰 업무를 강화함과 아울러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필리프는 인기 없는 정책을 장관에게 떠맡김으로써,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는 신흥국 총리 모델을 일찌감치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전쟁과 RP 거래

오늘날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서부의 보르도 지방을 13세기에는 아키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은 영국 왕 에드워드 1세가 상속받은 영지였다. 법률적으로 아키텐 공작(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가신이었다. 때문에 영국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아키텐에 관한 한 필리프의 신하 지위에 있었다. 1293년 영국이 프랑스의 항구도시 라로셸을 약탈하자,필리프는 에드워드를 프랑스 궁정으로 소환했다. 에드워드는 파리에 파견된 영국 대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자신의 ‘신하’라고 부르며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영국 왕은 자신의 동생 에드먼드 크라우치 백작을 보내 프랑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크라우치 백작은 프랑스 왕의 사촌이자 에드워드의 의붓아버지였다. 촌수가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당시는 근친혼이 흔한 일이었다. 영국 왕은 필리프를 달래기 위해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아키텐 공작으로서 복종의 표시로 프랑스 서남부의 가스코뉴를 일시적으로 필리프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용서하고, 일정 유예기간이 지난 뒤 가스코뉴를 영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일종의 RP(Repurchase Agreement·환매조건부채권) 계약, 즉 나중에 돌려받을 것을 조건으로 재산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하지만 필리프는 처음부터 그 땅을 에드워드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필리프는 아키텐 공작의 소환 거부를 구실로 에드워드의 프랑스 내 영지를 전부 몰수한다고 선언했고, 이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다. 이에 더해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중인 스코틀랜드에 군자금을 지원했고, 영국은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킨 플랑드르를 지원했다. 플랑드르는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남부 지역으로서, 유럽 최고의 모직물 산지였다. 필리프는 영국과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한 플랑드르에 천문학적 세금을 부과했고 파산의 기로에 놓인 플랑드르 상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필리프는 단기간에 플랑드르를 진압하고 영국과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최정예 부대인 중기병을 파견했지만 1302년 황금 박차 전투(Bataille des éperons d’or)에서 모두 괴멸하고 말았다. 기병은 귀족으로만 구성되는데, 말은 전쟁 도구이자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기병대의 모든 장구는 금과 은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는 원래 마구를 만들던 장인 집안이었다. 플랑드르 지방에는 늪지가 많았기 때문에 중무장한 프랑스 기병은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창으로 무장한 플랑드르의 경보병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 전장에는 프랑스 기병의 값비싼 마구가 널려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를 황금 박차 전투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세에 몰린 필리프는 자신의 어린 딸을 에드워드의 아들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이번에는 필리프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을 담보로 제공한 것이다. 냉정한 필리프는 2년 후 몽상페벨 전투에서 플랑드르 군대를 괴멸시킴으로써 내전을 종식시킨다. 1305년 필리프는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플랑드르에 막대한 배상금과 처벌을 요구했고, 자신의 직할지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모직물 도시인 릴, 두에, 베튠을 추가했다. 필리프는 자신의 딸을 담보로 에드워드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일시적 평화를 얻었지만, 이 결혼은 나중에 상속권 분쟁으로 이어졌고, 영국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일으킨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의 단초가 되었다.

국가 부도를 면하는 법

필리프의 치세 당시 프랑스 왕실의 연간 수입은 약 86만리브르(투르누아)로서 은(銀) 46t에 해당했다. 필리프는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왕관과 함께 막대한 전쟁 부채를 물려받았다. 당시 프랑스 왕실의 주채권자는 템플 기사단이었는데 매년 프랑스 재정수입의 17%를 이들에 대한 부채 상환 자금으로 지불했다. 필리프는 영토 확장과 증세를 통해 부채를 갚아 나갔다. 하지만 1289년 이후 작센의 은 생산량이 감소하고 필리프가 영국, 플랑드르와 전쟁을 치르느라 프랑스는 다시 적자재정으로 돌아섰다. 다중 채무자였던 필리프는 이탈리아 롬바르드 상인들에게 프랑스의 세금 징수권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있었다. 대출 만기일이 다가오고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필리프는 자신의 군대를 보내 롬바르드 상인들을 체포했고, 이들에게 채권 포기 각서를 작성하고 프랑스 국적을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이로 인해 필리프는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를 떼먹은 데다 재정수입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국적 판매 수입을 얻었다. 프랑스 국적을 강매한 결과, 롬바르디인은 프랑스 국민이 됐고, 필리프는 이들에게 적법하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