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스산맥을 넘는 말을 탄 멋진 나폴레옹을 그린 화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 은 프랑스혁명 당시 공포정치의 광풍이 불던 1793년 7월, 혁명정부의 지도자이며 유명 저널리스트였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의 암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마라의 암살 직후 정치적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다비드는 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순교자로 묘사된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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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에 들린 깃펜과 왼손에 든 핏자국이 선명한 편지, 핏빛으로 가득 찬 욕조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피로 얼룩진 칼까지, 그림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현장감 있게 묘사됐다. 그러나 화면의 분위기는 암살 현장의 잔혹한 서술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 속 마라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고, 캔버스의 절반을 차지하는 갈색톤의 배경에서 정적인 숭고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피부와 편지에 나타나는 빛의 효과. 화가는 생생한 사실적인 현장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순교자의 이미지를 최대한 표현하고 있다.
현실에서 마라는 만성적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욕조에서 일을 할 정도로 피부가 좋지 않았고, 암살자인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는 젊고 순결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화가인 다비드는 의도적으로 코르데를 그림에서 배제하고, 마라를 깨끗한 피부를 가진 순교자로 표현했다. 코르데는 그림에서는 사라졌지만, ‘마라의 죽음’ 그림 속 피 묻은 편지에는 이름이 등장한다. “마리안느 샤를로트 코르데로부터 시민 마라에게, 나는 당신의 자비를 구할 만큼 비참합니다.”
편지에서 마라의 손가락은 ‘자비’라는 단어를 가리키고 있다. 그림에서 마라의 자세는 이상화되어 순교자의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이는 화가 다비드가 로마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 좋아했던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순교적 이미지에서 차용한 것이다. ‘마라의 죽음’은 그 당시 공포정치의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때문에 복제품에 대한 수요도 엄청났다. 다비드의 제자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복제품들은 루브르박물관을 비롯해, 랭스, 베르사유 미술관 등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공포정치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정치적 동지로 활동했던 화가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등 공포정치의 주역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과 달리 처형은 면했지만,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정치 선전적인 의도를 가진 작품 ‘마라의 죽음’도 금기시되었다.
암살녀 코르데 부활하다
마라를 암살한 샤를로트 코르데는 ‘마라의 죽음’에선 의도적으로 사라졌지만,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프랑스 제2 제정기의 인기 화가였던 폴 보드리(Paul Baudry)는 암살녀 코르데를 부활시킨다. 보드리의 작품을 보면, 마라가 누워있는 구도와 머리의 흰 두건, 녹색 탁자 보, 탁자 등은 화가 다비드의 그림과 유사하다. 다른 점은 ‘마라의 죽음’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암살녀 코르데의 등장과 마라의 얼굴과 피부, 암살에 사용되었던 칼의 위치와 모양, 대비되는 암살 현장의 공간 등이다. 마라의 얼굴은 숭고한 이미지에서 칼에 찔린 고통의 얼굴로, 매끈한 피부는 거칠고 늙은 피부로 묘사됐다. 그리고 칼자국만 있는 다비드의 그림에 비해 보드리는 마라를 칼에 찔린 모습으로 그렸다. 칼의 손잡이도 흰빛의 상아에서 검은색의 흑단으로 처리했다.
두 작가는 확연히 다른 의도로 동일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암살 현장의 끔찍한 공간과는 대조적으로 암살녀 코르데는 프랑스 지도를 배경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위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암살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고 의연한 자세와 당당한 어조로 “나는 10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의연한 모습을 화가 보드리는 그녀의 얼굴 묘사로 표현하고 있다. 또 프랑스 지도를 통해 그녀가 프랑스를 구했다는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벽면에 있는 프랑스 지도의 일부는 붉은빛으로 얼룩져 있고, 순결을 상징하는 하얀 머플러와 파란 줄무늬 원피스를 프랑스 삼색기의 색상처럼 연출한 듯하다. 다비드가 ‘마라의 죽음’에서 마라를 순교자로 묘사했듯이, 보드리는 암살녀 코르데를 프랑스의 자유를 구한 애국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혁명의 잔 다르크였다
1889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해방 10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약동하는 프랑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에펠탑도 이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박람회 기간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렸는데, 미술 전람회도 그 일부였다. 미술 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화가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르투로 미첼레나(Arturo Michelena)였다. 그가 금메달을 수상한 것이 바로 단두대로 향하는 코르데를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에는 6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코르데는 문을 통해 들어온 빛을 맞으며 단두대로 가기 전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손이 뒤로 묶인 채 서 있다. 그림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남자가 단두대로 가는 코르데를 묘사하는 화가인 장 자크 오에르(Jean Jacques Hauer)다. 코르데 뒤 빨간 옷을 든 남자는 사형 집행인의 조수다. 빨간 옷은 코르데를 위한 것으로, 당시 사형수는 처형장에서 빨간 옷을 입었다. 이 작품이 1889년 만국박람회의 미술 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것은 바스티유 감옥 해방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만국박람회의 취지와 코르데로 상징되는 프랑스혁명 당시의 자유를 향한 시민의 애국심이 그림에 잘 묘사된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샤를로트 코르데의 의연함과 아름다운 이미지는 그녀 사후에 많은 예술가의 소재가 되었다. 우리에게 작품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뭉크도 ‘마라의 죽음’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지금도 코르데를 주제로 한 그림이 프랑스 국민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애국적인 혁명 정신과 죽음 앞에서 보인 고결하고 의기 있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10만 명의 프랑스 민중을 구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코르데와 그녀에 의해 암살된 마라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순교자의 위치가 바뀌고 예술 작품의 선호도가 변하는 것을 보면, 시대와 정치·사회적 지형에 따라 예술 작품도 그 가치와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