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태국 방콕에 있는 프아타이당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패통탄. /로이터연합
8월 18일 태국 방콕에 있는 프아타이당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패통탄. /로이터연합

1986년생으로 올해 38세인 패통탄 친나왓 프아타이당(Pheu Thai Party·태국을 위한 당) 대표가 태국의 제31대 총리에 취임했다. 역대 최연소 태국 총리다. 프아타이당은 태국 연립정부 제1당이다. 애초 차이까셈 니띠시리 전 법무부 장관이 차기 총리로 유력했지만 고령에 건강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패통탄 카드가 급부상했다. 

패통탄은 탁신 친나왓(75) 전 태국 총리의 막내딸이다. 부녀가 총리를 역임하게 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여성 총리로는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 즉 고모였던 잉락 친나왓 전 총리에 이어 두 번째다. 2001~2006년 재임한 부친 탁신과 고모 잉락(2011~2014) 그리고 2008년 잠시 총리직을 대행했던 탁신의 매제 솜차이 웡사왓까지 포함하면 한 집안에서 네 번째 총리가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외신은 친나왓 가문을 ‘태국판 케네디가(家)’ 로 부르며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방콕포스트 등 현지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연립정부 정당 단독 후보로 지명을 받은 패통탄은 8월 16일 태국 의회에서 열린 하원 총리 선출 투표에서 찬성 319표, 반대 145표, 기권 27표로 과반 득표에 성공했다. 이로써 패통탄은 8월 14일 태국 헌법재판소가 부패 인사를 장관에 앉힌 혐의로 해임 결정을 내린 세타 타위신 총리의 뒤를 잇게 됐다. 

패통탄은 8월 18일 마하 와찌랄롱꼰 태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했다. 와찌랄롱꼰 국왕은 이날 패통탄을 차기 총리로 승인했고 취임식이 진행됐다. 패통탄은 취임식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모든 아이디어에 귀 기울이겠다”며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해줄 것을 촉구했다.

“내 아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 정계 입문

미국에서 태어난 패통탄은 태국 최고 명문 대학인 왕립 쭐랄롱꼰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영국 서리(Surrey)대에서 호텔경영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탁신 일가가 주요 주주인 태국 부동산 기업 ‘SC에셋’과 아동 교육 자선단체 ‘타이콤 파운데이션’ 등의 경영에 참여하며 사업가로 활동했다. 2022년 기준으로 그는 친나왓 가문이 보유한 21개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가치는 약 680억밧(약 2조6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10월 잉락 전 총리가 창당한 정당 프아타이당 자문 역으로 정치에 처음 발을 들였다. 패통탄은 2022년 3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내 열정은 호텔에 있었지만, 아이를 낳고 생각이 바뀌었다”며 “내 아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패통탄은 이듬해인 2022년 3월 프아타이당 총재가 됐다. 정치 입문 후 불과 3년여 만에 총리 자리에 오른 것. 2023년 5월 총선에서는 프아타이당의 선거 운동을 지휘하면서 본격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제왕절개 수술로 둘째 아이를 낳고 이틀 만에 선거 유세 현장에 복귀해 화제가 됐다. 

당시 총선에서 프아타이당은 왕실 모독죄 개정과 군부 역할 축소 등 파격적 공약을 앞세운 전진당 돌풍에 밀려 원내 1당 등극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전진당의 급부상을 두려워한 군부와 친탁신 세력이 주축인 프아타이당이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고 새로운 집권 연정을 꾸리면서 패통탄도 태국 주류 정치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패통탄(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그의 부친 탁신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전 총리를 비롯한 친나왓 가문 구성원이 8월 18일 태국 방콕에 있는 프아타이당 당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PA연합
패통탄(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그의 부친 탁신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전 총리를 비롯한 친나왓 가문 구성원이 8월 18일 태국 방콕에 있는 프아타이당 당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PA연합

패통탄의 젊고 신선한 이미지가 프아타이당이 ‘부패 정당’ 이미지를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부친의 정치 영향력 덕을 크게 본 반면 본인의 인기는 높지 않아서 총리 임기 4년을 다 채우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 유권자의 6%만이 패통탄을 총리로 지지했다고 전했다. 

탁신 전 총리는 1980년대 친나왓그룹을 세워 막대한 부를 쌓고 2001년 총리로 선출됐다. 재임 시절 저소득층 빈곤 타파와 의료 복지 보편화, 인프라 구축 정책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2005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태국 정치인 최초로 단일 정당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그는 친나왓그룹 주식을 팔아 우리 돈 2조원이 넘는 차익을 챙기고도 세금을 내지 않는 등 여러 비리에 연루돼 공분을 샀다. 결국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부정부패 유죄 선고 직전 도피해 해외를 떠돌았다. 그는 자신의 세력인 프아타이당이 집권한 지난해 8월 15년 만에 귀국했다. 8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으나 올해 2월 가석방됐고, 8월 17일 왕실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탁신의 해외 도피 기간에 태국에서는 군부와 반(反)탁신 세력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행보를 이어가면서 ‘차라리 탁신이 낫다’는 여론이 커졌고 2014·2019년 총선에서 ‘탁신 없는’ 탁신 정당이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2023년 총선에서 ‘왕실 개혁’과 ‘군부 타도’를 내세운 전진당이 1위를 차지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탁신계와 군부는 곧바로 연정을 꾸리고 전진당 해산에 힘을 합쳤다. 이 과정에서 패통탄이 새 총리가 될 수 있었다.

패통탄은 “법적 문제가 없는 한 부친에게 (국정 운영에 관한) 조언을 구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탁신은 8월 19일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내가 앞에 서 있었고 딸이 내 뒤에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뒤에 있다”고 몸을 낮췄다. 이어 “나는 너무 늙었다. 이제 75세”라며 “전화로 모든 문제에 대해 조언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 지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고문직을 맡을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패통탄은 태국의 경제 침체, 군부와 왕당파가 반복적으로 민주화를 방해하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등 숱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경제 상황도 좋지 않다. 남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대국인 태국은 불어난 가계 부채와 고금리, 중국 경제 감속으로 인한 수출 부진 등이 성장 발목을 잡으면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2% 미만의 경제성장률을 이어왔다. 

부친 탁신의 사법 리스크와 해산된 전진당의 후속 인민당의 인기도 불안 요인이다. 

태국 검찰은 2024년 6월 탁신 전 총리가 2015년 한국 언론과 인터뷰 때 왕실 모독 발언을 했다고 보고 그를 기소했다. 당시 그는 태국 왕실 추밀원이 여동생인 잉락 총리를 끌어내린 2014년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유죄 판결 시 탁신 전 총리가 또다시 실형을 살면 잠시 봉합된 친탁신계와 친군부 간 묵은 갈등이 재점화할 수도 있다.

8월 7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전진당이 주도한 왕실 모독죄 개정은 체제 전복 시도’라며 전진당을 강제 해산했다. 전진당은 지난 총선에서 군부 영향력 축소 등 개혁 공약을 앞세워 인기몰이했다. 전진당이 강제 해산된 직후, 인민당이 신규 창당되자 당원 가입과 후원이 몰렸다. 8월 10일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인민당은 신규 당원 4만 명을 추가로 모았고, 창당 후 하루 만에 2000만밧(약 7억8000만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Plus Point

中 저가품 홍수에 경제 ‘휘청’… 문 닫는 공장 40% 급증

중국산 저가 수입품 홍수 등으로 인해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태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태국 산업부에 따르면 2023년 7월∼2024년 6월 1년간 태국에서 공장 1975곳이 문을 닫았다. 1년 사이에 약 40% 불어난 것이다. 같은 기간 공장 폐쇄로 발생한 실직자 수도 전년 동기보다 약 80% 급증한 5만1541여 명에 달했다.

자동차 등 경제 주력 산업도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일본 혼다자동차는 내년까지 태국 아유타야주 공장의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쁘라찐부리주 공장으로 생산을 통합한다고 밝혔다. 혼다는 1996년 완공한 아유타야 공장을 자동차 부품 공장으로 개조할 계획이다. 태국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는 제조업이 이처럼 타격받으면서 지난해 태국 경제성장률은 다른 동남아 주요국에 크게 못 미치는 1.73%에 그쳤다.

이용성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