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향의 비결 ‘며느리도 몰라’
‘병맛’ TV 광고로 젊은 층에 어필
2024년 6월 전 세계 탄산음료 마니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이어오던 ‘닥터페퍼’가 지난해 미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펩시콜라를 제치고 2위에 올라선 것. 시장조사 업체 비버리지 다이제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닥터페퍼는 8.34%의 점유율을 기록해 부동의 2위였던 펩시콜라(8.31%)를 밀어냈다. 코카콜라는 19.18%의 점유율로 선두를 굳게 지켰다. 4위는 스프라이트(8.09%), 5위는 다이어트 코크(7.82%)가 차지했다.
닥터페퍼 캔의 고유 색상은 ‘버건디’다. 코카콜라의 붉은색과 펩시콜라의 푸른색을 섞어 만든 듯하다. 하지만 업력(?)을 따지면 닥터페퍼가 둘의 선배다. 텍사스주 웨이코(Waco)에서 약사로 일하던 찰스 앨더튼(Charles Alderton)이 1885년에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코카콜라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기 1년 전이다. 펩시콜라는 그보다 2년 뒤인 1898년 탄생했다. 하지만 닥터페퍼의 인기는 오랫동안 텍사스주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 국한됐다.
공교롭게도 세 음료 모두 약사가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카콜라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약사 존 펨버턴이 두통에 효과가 있는 진통제를 만들기 위해 직접 만든 시럽과 탄산수를 혼합하는 실험을 하다 만들었다. 펩시콜라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 약사인 케일럽 브래덤이 제조했다.
엄밀히 따지면 닥터페퍼는 코카콜라·펩시콜라와 결이 다른 음료다. 1963년 미국 연방법원이 콜라의 원료가 되는 콜라나무 열매를 성분에 표기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닥터페퍼는 콜라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탄산과 당도가 센 과일 향 콜라’가 처음 맛본 닥터페퍼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겠지만 ‘콜라’ 부분을 빼야 한다면 설명이 쉽지 않다.
코카콜라의 경우도 그렇지만 닥터페퍼의 정확한 성분은 ‘며느리도 모르는’ 일급비밀이다. 제조사인 큐리그 닥터페퍼(KDP)는 닥터페퍼에 23가지 맛과 향이 배어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표기 성분만 봐서는 그게 뭔지 알 길이 없다. ‘천연 및 인공 향료(natural and artificial flavors·국내에서는 두 종류의 ‘혼합 제제’로 표기 )’라는 애매모호한 문구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체리·아몬드·블랙베리·감초·레몬·생강·라즈베리·바닐라·정향(clove)·육두구(nutmeg) 등이 닥터페퍼 마니아 사이에서 단골로 거론되는 23가지 맛의 유력한 후보다.
맛을 떠나서도 알듯 말듯 모호함은 닥터페퍼 고유의 DNA다. 닥터페퍼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앨더튼이 버지니아주에 살던 시절 그를 처음 고용한 찰스 페퍼(Charles Pepper)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작명이라는 설과 찰스 페퍼가 앨더튼이 교제하던 여성의 부친이었다(호감을 사기 위한 작명)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콜라인 듯 아닌 듯 모호한 정체성은 닥터페퍼가 코카콜라와 펩시코(펩시콜라의 모기업)라는 거대 기업 사이에서 오랜 시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전략 기반이기도 했다. 맥도널드와 KFC 등 국내에도 진출한 패스트푸드 체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코카콜라가 들어가는 곳에서 펩시콜라도 함께 판매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회사 모두 ‘콜라’의 영역에서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공급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닥터페퍼는 특유의 모호함 덕분에 유통·공급망을 넓힐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패스트푸드점에는 코카콜라와 닥터페퍼, 펩시콜라와 닥터페퍼를 함께 제공하는 곳이 많다. 샌드위치 체인 써브웨이(Subway) 국내 매장에서도 코카콜라와 닥터페퍼를 함께 판매한다. 닥터페퍼의 국내 판매를 한국코카콜라가 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클 넣어 마시기’ 등 이색 챌린지도 인기
‘색다른 뭔가’에 목마른 젊은 층을 집중 공략한 것도 닥터페퍼의 미국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린 주요 원동력이다. 미국에서는 프로 스포츠 못지않게 인기가 많은 대학 풋볼(미식축구)과 소셜미디어(SNS)가 주된 매개체다.
닥터페퍼는 2014년 미국 대학 풋볼 플레이오프의 공식 스폰서가 됐다. 이후 ‘팬스빌(Fansville)’이라는 제목의 TV 광고 캠페인이 크게 히트하면서 대학 풋볼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팬스빌은 일상의 모든 것이 오로지 대학 풋볼과 닥터페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상의 마을이다. 올해로 일곱 번째 시즌에 접어든 팬스필 광고 캠페인의 웃음 코드는 ‘병맛’이다. 법정에서 판사가 “닥터페퍼 없는 열 번의 토요일”을 선고하자 피고인이 “차라리 감옥에 보내달라”며 절규하는 식이다.
이밖에 거대한 닥터페퍼 캔 모양의 통 안에 정해진 시간 동안 풋볼(미식축구공)을 가장 많이 넣는 대학생에게 무려 10만달러(약 1억3492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하프타임 장학금 이벤트’ 등을 통해 대학 풋볼 문화의 일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한 인플루언서가 숏폼(짧은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에서 시작한 닥터페퍼에 피클을 넣어 마시는 챌린지가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약 3개월 전에 올라온 해당 영상의 조회 수는 500만 회를 넘어섰다(생각보다 맛이 괜찮다는 의견이 많다).
닥터페퍼의 미국 점유율 상승 이면에는 제조사 입장에서 ‘불편한 진실’도 숨어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로 탄산음료 소비가 줄면서 다양한 제품군을 보유한 펩시코는 스포츠 음료와 무설탕·무열량 등 이른바 ‘제로(0)’ 음료 등에 대한 사업 비중을 늘리고 있다. 닥터페퍼가 잘해서 점유율이 올라간 측면도 물론 있지만, 펩시코의 전략 수정에 따른 반사이익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펩시코는 2020년 에너지 음료 제조 업체 록스타를 38억5000만달러(약 5조1944억원)에 인수했다.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미국에서 탄산음료 판매(물량 기준)는 24% 감소했다.
펩시코는 펩시콜라 외에도 게토레이, 트로피카나를 비롯한 다양한 음료 브랜드와 도리토스, 레이즈 등으로 유명한 스낵 브랜드 프리토레이, 곡물 식품 브랜드 퀘이커 오츠 등을 소유한 거대 기업이다.
모기업은 식품 왕국 꿈꾸는 독일 부호 가문의 투자사
닥터페퍼의 제조사 큐리그 닥터페퍼(KDP)는 2018년 커피 공급 업체 ‘큐리그 그린 마운틴(Keurig Green Mountain)’과 청량음료 제조사 ‘닥터 페퍼 스내플(Dr Pepper Snapple)’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KDP의 모기업은 독일 최대 부호 중 하나인 라이먼(Reimanns) 가문의 투자사 JAB홀딩스다. 본사는 룩셈부르크에 있다. JAB홀딩스 지분 95%를 보유한 라이먼 가문의 보유 자산(8월 19일 포브스 추산)은 약 56억달러(약 7조5555억원)다. JAB홀딩스는 2012년 피츠커피앤드티와 카리부커피 인수를 시작으로 에스프레소 하우스, 크리스피크림도넛, 파레나브레드, 프레타망제(영국 샌드위치 체인), 아인슈타인 브로스 베이글 등에 이르기까지 식품 커피 왕국 건설을 위해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진행해 왔다. 구찌 화장품을 비롯해 휴고보스, 티파니 향수 등 명품 기업의 화장품·향수 브랜드 라이선스를 보유한 코티(Coty)와 스위스 명품 브랜드 발리(Bally)도 JAB 산하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