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리건 주립대 연구진이 2014년 선박과 충돌해 죽은 대왕고래 사체를 조사하고 있다. /미 오리건 주립대
미국 오리건 주립대 연구진이 2014년 선박과 충돌해 죽은 대왕고래 사체를 조사하고 있다. /미 오리건 주립대

3월 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동부 조지아주 해변에서 북방긴수염고래 새끼 한 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다. 몸에는 선박 프로펠러에 베인 자국이 선명했다. 같은 달 30일에는 버지니아주 해변에서 다 자란 암컷 북방긴수염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발표에 따르면, 암컷 고래는 선박과 충돌해 허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이 고래는 2월에 새끼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 목격됐는데, 어미가 죽고 나서 새끼는 보이지 않았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고래는 살아남기 힘들다.

북방긴수염고래는 전 세계에 36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 위기 동물이다. 한 달도 안 돼 그중 세 마리가 사라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금처럼 바다를 오가는 선박이 늘면 고래와 충돌 사고도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곳곳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를 선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고래가 지나가면 항로를 바꾸도록 선박에 알리는 한편, 고래 위치를 파악하는 첨단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고래 충돌 사고 막는 해양 교통방송

미국 UC 샌타바버라 베니오프해양과학연구소(이하 베니오프연구소)는 8월 11일 “멸종 위기에 처한 북방긴수염고래가 미국 동해안을 오가는 화물선 속도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기술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소는 2016년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인 세일즈포스(Salesforce) 창업자 겸 대표이자 ‘타임’ 소유자인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가 기부한 1000만달러(약 134억원)로 설립됐다. 연구소는 2022년 베니오프 부부로부터 6000만달러(약 809억원)를 추가로 기부받았다.

전 세계에서 매년 고래 2만 마리가 선박 충돌로 죽는 것으로 추정된다. 2050년까지 전 세계 해상 교통량이 최소 240% 증가한다고 예상하는 만큼 고래와 선박 충돌 사고는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베니오프연구소는 고래와 선박의 충돌을 막기 위해 ‘고래 안전(Whale Safe)’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한 선박 분석 도구는 그중 일부다. 이를 이용하면 정부나 해운 업체, 환경보호 단체, 일반인이 고래가 이동하는 해역에 있는 화물선 속도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바다에서 고래와 선박의 충돌을 막기 위해 교통방송을 하는 셈이다.

2024년 3월 30일 미국 버지니아주 해변에서 다 자란 암컷 북방긴수염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암컷 고래는 선박과 충돌해 허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버지니아 수족관해양과학
2024년 3월 30일 미국 버지니아주 해변에서 다 자란 암컷 북방긴수염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암컷 고래는 선박과 충돌해 허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버지니아 수족관해양과학
센터 2 북방긴수염고래 암컷이 새끼와 같이 이동하는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북방긴수염고래는 36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 위기 동물이다. /NOAA
센터 2 북방긴수염고래 암컷이 새끼와 같이 이동하는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북방긴수염고래는 36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 위기 동물이다. /NOAA

과학자들은 고래 충돌 사고가 알려진 것보다 피해가 더 크다고 본다. 2018년 캘리포니아주에서만 선박과 충돌해 죽은 고래가 14마리나 나왔다. 베니오프연구소에서 고래 안전 프로젝트를 이끄는 캘리 라이프하르트(Callie Leiphardt) 박사는 “충돌 사고로 죽은 고래 한 마리가 발견될 때마다 알려지지 않은 10마리가 충돌 사고로 더 죽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선박은 고래가 지나가는 해역을 지나갈 때 자발적으로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자율 속도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고래가 죽은 것은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베니오프연구소 과학자들은 선박에 고래가 있다는 경고를 보내면서 동시에 어떤 회사가 제한속도를 무시했는지 공개함으로써 규정 속도를 더 잘 지키도록 유도해 고래 사망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중 마이크부터 인공위성까지 동원

고래 안전 과학자들은 고래가 내는 저주파를 바다의 배경 소음과 분리할 수 있는 마이크를 부표에 달았다. 고래 전용 수중 마이크를 설치한 것과 같다. 고래 안전 프로그램은 마이크가 수집한 고래 정보를 토대로 인근 해역을 지나는 선박에 속도를 줄이라고 경고한다. 동시에 위성항법시스템(GPS)을 통해 저속 운항 해역에서 선박이 속도를 잘 지키는지 파악해 A부터 F까지 점수를 매긴다. 고래 안전 프로그램은 8월부터 북미 지역의 모든 저속 운항 해역을 지나는 선박을 평가한다.

고래 안전 프로그램은 성과를 보였다. 2020년 미국 서부 샌타바버라 해안에서 시작해 8월에는 동해안까지 확대됐다. 캘리포니아주에서 확인된 고래 충돌 사고는 2021년 11건에서 2022년 4건으로 줄었다. 이는 선박이 자발적으로 위험 해역에서 속도를 줄인 덕분이다. 베니오프연구소에 따르면 충돌 위험 지역인 샌타바버라 해협에서 속도를 줄인 선박은 2019년 46%에서 2023년 63.5%로 증가했다.

고래 추적 노력은 우주로도 확대됐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은 7월 미 항공우주국(NASA)과 선박 충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인공위성으로 고래를 추적하는 기술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고래를 탐지해 주변을 지나는 선박에 경고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2022년 칠레는 선박에 대왕고래와 보리고래, 혹등고래, 남방긴수염고래 같은 대형 고래류를 알리는 음향 부표(浮標)를 바다에 설치했다.

같은 해 그리스 과학자들은 지중해에서 향유고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기술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 원리는 바다에 추락한 항공기 블랙박스를 찾는 것과 같다. 과학자들은 그리스 크레타섬 남쪽 수심 5㎞ 바다에서 부표 세 개를 1~2㎞ 간격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설치했다. 각 부표에는 수중 마이크가 100m 길이 줄에 매달려 있다. 향유고래가먹이를 찾기 위해 딸깍 소리를 낼 때마다 각각의 마이크가 소리를 포착해 이를 이용해 고래 위치를 삼각 측량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수면에서 반사된 소리를 통해 향유고래가 있는 바다의 깊이를 알아냈다.

충돌 사고를 피하려면 한쪽이 피해야 한다. 고래가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인간이 행동해야 한다. 앞서 베니오프연구소 과학자들은 15년 동안 위성 신호기를 단 대왕고래를 추적해 먹이 서식지가 선박 항로와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과학자들은 2014년 국제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해당 선박 항로를 옮기면 충돌 사고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무작정 항로를 옮기긴 어렵다. 과학자들은 차선책으로 고래 위치를 알려주고 선박 속도를 줄이도록 바다 교통방송을 개발하고 있다. 과연 과학자들의 노력이 바다에서 결실을 거둘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영완 조선비즈 사이언스조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