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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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발생한 전 세계적인 경제 충격은 유럽을 특히 취약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기후변화와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고통받았지만, 유럽연합(EU)은 이에 더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아주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① 유럽의 극심한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상승이라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러시아의 화석연료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키웠다. 성장과 경제·안보 양쪽이 압박을 받았다.

물론 이런 문제 중 일부는 단기적인 충격이었다. 팬데믹과 관련한 혼란은 대체로 해소되었고, 팬데믹 여파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ECB와 EU 개별 회원국 중앙은행의 노력 덕분에 상당 부분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12개월 이내에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EU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몇 가지 상당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선, 주변 지역의 안보 위험이 커지고 있다. 유럽의 안보를 위한 미국의 헌신이 지속될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EU는 자체 안보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이는 회원국 간 공조 필요성을 높일 뿐 아니라, 방위비 지출의 상당한 증가를 의미한다. 현재 EU는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3%를 국방비로 지출하는데, 이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목표인 ② ‘GDP의 2%’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게다가 유럽의 생산성 성장률은 특히 낮다. 전 세계에서 생산성 성장이 둔화하는 흐름이지만, EU와 미국 간 격차는 매년 벌어지고 있다. EU는 실업률이 약 6.5%이므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총수요를 늘릴 여지가 있지만, 생산성 저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럽의 장기적이고 견고한 성장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 경제가 장기적인 생산성 성장을 기록하기 위해선 기술혁신이 주도하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조차 유럽을 뛰어넘고 있다.

EU의 혁신이 부족한 원인은 잘 알려져 있다. 기초연구와 응용 연구 모두 지속적으로 연구개발(R&D) 투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EU 차원의 재정 집행과 관리보다 개별 회원국 차원의 목표가 불분명한 프로그램이 우선시됐다. 조율되지 않고 분산된 접근은 기초연구에 투자하는 효과를 낮춘다. 게다가 단일 시장 통합이 아직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서비스 산업 분야에서 통합이 더디다. 디지털 분야에선 혁신으로 만들어낸 투자 수익이 시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므로중요한 문제다.

EU가 혁신 허브가 되는 데는 또 다른 장벽이 존재한다. 하나는 인프라 부족이다. 특히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필요한 방대한 컴퓨팅 파워(computing power)가 부족하다. EU는 현재 이 역량을 주로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혁신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벤처캐피털과 사모펀드가 광범위하게 활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U 내 여러 국가에 유망한 기업 생태계가 존재하지만, 젊은 기업가가 혁신적인 기업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경험과 동기를 가진 투자자가 적다.

EU는 이런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만약 극복한다면, EU는 명문 대학에서 나오는 풍부한 인재를 강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유럽의 고도화된 사회 서비스와 사회보장 시스템은 기업가가 위험을 감수하게끔 하는 경제적 안전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EU가 구조적 변화를 이끄는 기술 동력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경제의 일부는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을 도입하는 데 느린 것으로 입증된 전통적인 산업 부문에 의해 주도될 것이다. 무형자산에서 가치가 점점 더 많이 파생되는 글로벌 경제에서 EU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유형자산에 계속 의존할 것이다. 인재가 기회가 더 많은 곳으로 이주함에 따라, 유럽의 풍부한 인적 자본은 점점 더 얕아질 것이다.

유럽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침체로 이어질 것이 확실한 현재 경로를 유지할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지 말이다. 후자의 접근 방식은 더 위험하지만, 훨씬 더 큰 잠재 이익을 제공한다. 유럽이 직면한 도전 과제를 이해하고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계획을 고안, 토론, 수정 및 실행하는 정부·기업·학계의 인재는 부족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EU 회원국 내에서도, EU 차원에서도 우선순위의 의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선거철 정책 토론에서도 다뤄지지 않는다.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명확한 인식, 정책과 투자를 이끄는 강력한 비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정이 어려울 때 사람들의 동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는 이를 종종 인식하지 못하지만, 유럽은 지속 가능한 경제 모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이를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목적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지속 가능한 경제 모델을 채택했던 사례다. 마찬가지로 성공한 개발도상국 지도자는 보통 원하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제시한다.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 거쳐야 할 어려운 선택을 장려하고, 미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EU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과 디지털 및 구조적 변화를 위한 로드맵을 충분히 고안할 수 있다. 하지만 먼저 유럽인은 간단하지만, 중요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10년 후의 EU는 혁신, 경제, 안보, 회복력 측면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프로젝트신디케이트

마이클 스펜스 스탠퍼드대 경제학  명예교수전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장,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마이클 스펜스 스탠퍼드대 경제학 명예교수
전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장,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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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경제성장이 앞으로도 미국에 비해 뒤처질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7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EO)’에 따르면, 유로존(유럽연합의 단일 화폐인 유로를 사용하는 국가) 경제는 올해 0.9%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5.0%), 미국(2.6%), 한국(2.5%) 등과 비교하면 경제성장률이 낮다. 특히 엔데믹(e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 이후 미국은 예상 밖의 빠른 회복에 성공했지만, 유로존 경제는 부진을 지속하고 있다.

필자는 생산성이 낮고 기술혁신이 부족한 것이 유럽 경제 저성장의 원인이라고 본다. 구조적인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유럽중앙은행(ECB)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노동생산성은 0.5% 상승한 반면 유로존 노동생산성은 1% 가까이 감소했다. 한국은행도 올해 초 보고서에서 “2010~2019년 미국과 유로의 성장률 차이(연평균 0.9%포인트)는 생산성(0.5%포인트)과 노동 투입(0.4%포인트)에 대부분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신생 테크 기업이 자본을 조달하기 용이한 환경을 갖춰 기술혁신에 우위를 점하는 반면, 유럽은 관광업이나 자동차 제조업 등 전통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필자는 생산성 저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럽의 장기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이어 유럽이 명확한 경제 비전을 갖고 기술혁신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한다.

Tip

① KDB미래전략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유럽에 공급된 원유의 25.7%, 천연가스의 34.5%, 석탄의 49.1%가 러시아산이었다. 2022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유럽 내 에너지 가격이 치솟자,유럽 각국은 서둘러 화석연료 사용량을 줄이고, 노르웨이, 아프리카 등으로 공급처를 다변화했다. 또 EU는 2022년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리파워EU-(REPowerEU)’ 전략을 발표했다. 재생에너지를 대폭 확대해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을 2030년 45%로 높이고 2027년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0’으로 낮출 계획이다.

② NATO 회원국은 GDP 대비 2%를 방위비로 지출하기로 2014년 합의했다. NATO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폴란드(3.90%), 미국(3.49%), 그리스(3.01%) 등 11개국만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독일(1.57%), 이탈리아(1.46%), 스페인(1.26%) 등은 목표치에 미달해 미국 정치권에선 ‘유럽이 미국에 안보를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NATO 회원국은 GDP 대비 3%를 방위비로 반드시 지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이클 스펜스 스탠퍼드대 경제학 명예교수

정리=고성민 기자, 오윤서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