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작가
감리신학대 학⋅석사, 전 청파교회 담임목사, ‘고백의 언어들’ 저자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김기석 작가
감리신학대 학⋅석사, 전 청파교회 담임목사, ‘고백의 언어들’ 저자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인간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다.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 속에서 지낸다. 방황이 상수인 삶,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이다.” -김기석의 ‘고백의 언어들’ 중에서.

오랫동안 우리 시대의 설교자 김기석의 언어를 찾아다녔다. 신학과 인문학을 경계 없이 아우르는 그의 강연은 우리를 멈춰 서게 한다. 처음엔 다정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으로. 그다음엔 인간의 영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잇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증명으로.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웃는 입에서 개울처럼 졸졸 흘러나오는 그의 언어는 세상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가 만나는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43년 동안 섬기던 청파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은 후 펴낸 책 ‘고백의 언어들’은 가히 김기석 언어의 정수라 할 만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서 시작해, 괴테의 ‘파우스트’와 단테의 ‘신곡’, 시몬 베이유의 ‘머뭇거림’을 지나 샤갈과 렘브란트의 그림 앞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종교 서적이라기보다 곁에 두고 오래 참고할 만한 인문 바이블에 가깝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미지의 전능자에게 기도하는 모든 신실한 이를 대신해, 기독교 사상가이자 ‘고백의 언어들’ 저자인 김기석에게 만남을 청했다. 은퇴 후 지인들이 서재로 마련해줬다는 과천의 아담한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반짝이는 눈이 웃으며 나타났다. 여기서 저 너머를 보는 듯한 시인의 눈, 감옥에서 오래 수련한 사람 같은 형형한 눈이었다.

불 켜진 등대가 표정을 지으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서가와 책상, 실내 자전거만 놓인 단출한 공간에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쉬고 있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비스듬히’라는 시를 좋아해요. 우린 각자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어요. 나에게 꿈이 있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잠시 기대고 돌아가서, 좀 더 맑아지면 좋겠다는 거예요.”

은퇴한 목사가 체리와 자두를 손수 씻어 접시에 놓아주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보자기 속 산수화가 근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멋진 수묵화다. 절벽이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같다.

“이 그림을 보면 나는 저 바위 위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고 싶다(웃음).”

우두커니요?

“내 꿈이 우두커니 있는 거다. 그 얘기를 했더니, 아는 이가 또 ‘우두커니’라는 제목의 책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더라.”

미소가 동심원처럼 퍼지는 얼굴 위로 바람이 들이치자, 그가 사뿐사뿐 걸어가 창문을닫았다. 편백 나무 서가에 배인 나무 향이 공기 중에 찻물처럼 풀어졌다. 거장들이 초대된 티(tea)파티처럼, 장르의 진폭이 큰 책들이 경계 없이 수더분하게 꽂혀 우리를 바라보았다.

호퍼의 그림에는 내러티브가,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시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에는 감정이 배어있다. ‘우두커니’ 누리는 시간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나. 

“즐거움이다. 전철 타고 오면서 책을 보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잠시 휴대전화만 안 보면 누릴 수 있는 시간인데⋯. 30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 독서의 시간은 나를 잊는 시간이다.”

나를 잊는 게 왜 그렇게 좋은가.

“숙명여대 교수 한 명이 암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됐다고 한다. 6개월 남은 시간을 뭐에 쓸까 하다가 암벽등반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봉산에 가서 바위를 타고 있으면 ‘내가 죽으면 아내는 어떻게 살지, 자식은 어떻게 살지, 학교는 어떻게 끝내지’ 이런 근심 걱정이 하나도 안 떠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바위 앞에서 나를 잊는 시간에 서서히 건강이 회복돼, 병을 잊고 오래 살았다고 한다. 나를 잊는다는 건 그런 거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나를 잊을 새가 없다. 다들 운동하고 독서하고 기록하고, 빽빽한 루틴을 만들어 ‘더 나은 나’를 향해 돌진한다.

“자기 관리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다. 철저히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도 용기다. 그러나 그 일상을 규정하는 게 ‘카피(copy)’라면 문제가 있겠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건 나도 누려야 해, 다른 사람이 근육 키우면 나도 키워야 해⋯. 이렇게 유행을 따라 하면 카피다.”

김기석 작가. /사진=채승우 객원기자
김기석 작가. /사진=채승우 객원기자

어떤 철학자는 ‘미지근하게 살면 지옥에도 못 간다’는 단테의 ‘신곡’을 인용하면서 최선의 길을 가지 않는 게으름이 죄라고도 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나.

“종교 개혁자들은 차라리 ‘과감하게 죄를 지으라’고도 했다. 종교적인 계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내게 주어진 자유를 낭비하지 말라는 거다. 주어진 시간을 한껏 살아내고 설사 그 삶의 가능성이 죄로 귀착된다 해도, 그건 차후의 문제니, 일단 뭐라도 하는 게 낫다.”

기독교 사상가, 목회자, 문학평론가, 강연가…, 세상이 부여한 여러 정체성의 옷을 입고 살았는데, 스스로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나.

“스스로는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자라고 생각한다. 순례자와도 연결된다. 목회자로서는 뛰어나지 못했다.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일은 서툴렀다. 제일 편안할 때는 수도원에 가서 침묵하는 시간이었다.”

필멸의 동지로 모든 생명체를 인식하면 서로의 사무침을 헤아리는 ‘편안한 슬픔’에 이르게 된다고 배웠다. 이번 책 ‘고백의 언어들’에서 인간의 기본 정조를 ‘불안’이라고 했던데, 불안 덕분에 인간답게 된다니 그건 또 무슨 뜻인가.

“불안은 자기 속이 근본적으로 비어있음으로 생긴다. 그런데 그 빈터는 다른 걸로 메워지지 않는다. 개별 인간 마음속에 도사린 불안의 공터를 채울 유일한 해결책은 ‘의미’다. 그런데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타자를 책임지려 할 때다. 

‘마태복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구절이 있다. 예수는 ‘내가 그 짐을 다 맡아줄게’라고 하지 않는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한다. 그 역설 속에 진실이 있다. 내 생애 문제로 골똘할 때는 문제가 안 풀린다. 오히려 나의 시련을 공적 자산으로 삼아 타인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들 때 놀라운 힘이 생긴다.”

그렇게 의미와 보람을 찾을 때 생기는 감사와 기쁨이 불안의 유일한 해독제라고 했다.

예일대 심리학자 폴 블룸은 ‘최선의 고통’에서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라 고난과 성장이라는 진화의 원리로 설계됐다고 주장했다. ‘고백의 언어들’에서 소개한 칼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도 그와 유사한 건가.

“한계 상황은 일종의 벼랑 끝 체험이다. 예컨대 죽음, 질병, 무기력 등의 상황이다. 서양인이 느끼는 한계 상황의 또 다른 측면은 죄책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아버지가 신을 저주했다는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서양은 죄책의 문화다. 서양인은 신 앞에서 느끼는 죄스러움, 존재의 무게를 고민한다면, 동양은 수치의 문화다. 타자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까, 어떻게 하면 공동체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고 괜찮게 보일까를 염려한다. 어떤 상황이든 벼랑 끝에 이르면 실존적 도약을 할 수 있다. 갑자기 암에 걸리면 승진이나 주식 가치가 다 무슨 소용이겠나. 모든 게 상대화되면서 ‘내 삶은 뭐지?’ ‘내가 잘 살았나?’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없다. 한계 상황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이다.” 

반면 행복은 실존적 도약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가.

“행복은 돌이켜보면서 ‘참 좋았지’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행복은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내가 충격 요법으로 ‘불행해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은 행복을 꿈꾸는 거다’라는 말을 가끔 한다. 그럼에도 지금 행복하려면 향유하면서 한 발짝씩 걸어가면 된다. 향유와 소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구분했다. 꽃 한 송이가 있을 때 ‘참 좋다’라고 느끼면 향유이고, 꺾어서 내 것으로 만들면 소유다. 사실 하나님도 우리에겐 향유의 대상이다.”

신도 향유의 대상이라고.

“그렇다. 좋아서 믿는 것이지 받아내려고 믿는 건 아니다. 출세가 보장되고 불행이 없어질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신을 사용하는 거다. 내가 재밌게 본 영화 중에 ‘브루스 올마이티’라고 있다. 신에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브루스라는 인물이 전능자가 돼 보는 이야기다. 가령 브루스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서 사랑을 고백할 때 달을 끌어온다. 그런데 달이 지구와 가까워지니 반대편에선 해일과 지진이 일어난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누군가에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서 올라오는 기도를 다 들어줄 수가 없다.”

문득 궁금하다. 목사였지만 허무를 느낄 때는 없었나.

“사실 청년 시절, 나를 가장 괴롭혔던 감정이 허무감이었다. 인간은 무에서 창조됐기에,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다. 원래의 질료로 돌아가려는 근원적 끌림이 허무 의식이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역사에 대한 책무 의식이 있었음에도, 나는 엄청난 허무감에 시달렸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그런 감정이 희석됐다. 허무를 극복한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40대가 돼서야 허무의 세례를 받았던 게 도움이 됐다.”

허무의 세례라고?

"내 안에 집착과 애착이 없다 보니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더라. 예컨대 ‘이걸 놓치면 끝나는 거야’ ‘인정받지 못해서 속상해’ 이런 마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좋아해 주면 감사하지만, 별로 들썩이진 않는다. 환호는 언제든 거둬질 수 있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음이 젊은 날 허무 의식이 준 선물이다.”

흑백의 당위를 요구받던 한 시절을 지나오면서, 그가 느낀 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뿌리 뽑힘의 감정이었다. 흑과 백이 아닌 회색 지대에서 김기석의 ‘머뭇거림’은 무르익었다.

외로운 청년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나.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건 기막힌 기적이다. 우리가 사는 이 ‘창백한 푸른 점(지구)’ 말고는 우주에서 어떤 지적인 생명체가 발견된 적이 없다. ‘넌 공부를 못해, 키가 작아⋯’ 세상이 우리에게 수모를 안겨주려 해도, 나 만큼은 나를 수용해야 한다. 기적으로서의 내 삶을 살아내야 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나는 제러미 리프킨이 들려준 행복의 수학 공식을 좋아한다. H(Happiness)=C(Capi-tal)/D(Desire). 사람들은 H(행복값)가 커지려면 C(자본값)가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D(욕망값)를 줄이면 자연히 H가 커진다. D를 조절하는 비법은 소유보다 향유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꽃 한 송이의 신비를 향유하면 명품 가방이 없다고 불행해지지 않는다. 청년들에게 당부한다. 혹시 ‘내가 속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 말이다. ‘이 정도는 누려야 행복한 거지’라고 말하는 타인의 기준에 내 인생을 떠맡기는 건 아닌지 말이다.”

소유에서 향유로, 잘 전환할 수 있는 팁이 있을까.

“누가 좋은 차를 타도 ‘난 됐어. 필요하지 않아’ 이 말을 입에 붙이면 평정심이 더해진다. 난 ‘됐거든’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웃음). 우리 안에는 식민지가 있어서 ‘좋아요’ 댓글 하나에 내 자유와 행복을 덥석덥석 넘겨준다. 그래서 연약한 나는 칭찬 댓글도 보지 않는다(웃음). 휘둘리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무신론자에게는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나.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기독교 신앙은 인류가 가진 매우 가치 있는 유산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그 가치를 향유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낭비다. 나는 비기독교인에게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저 사람 곁에 가면 참 좋다, 끌린다, 알고 보니 예수 믿네’ 이 정도면 좋겠다. 다짜고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외치면 싫지 않나(웃음). 어쩌면 선교도 매력의 감염이다. 내가 매력 있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선교가 어디 있겠나. 슬픔도 지층 아래로 내려가면 다 통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근원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Minds Connector)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위대한 대화’ 저자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위대한 대화’ 저자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