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기량을 자랑하다가도 20대 후반이면 전성기가 꺾이고 30대면 은퇴하는 선수가 대부분인 한국 여자 골프 무대에서 배소현(31)은 독특한 존재다.
주니어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프로 무대에서도 10여 년간 존재감이 희미했던 선수가 30대 들어 꽃을 피웠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골프 인생 전반의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군 반전 드라마는 더 뜨겁고 더 깊은 감동을 준다.
데뷔 8년 만, 154번째 대회에서 생애 첫 승
배소현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더헤븐 마스터즈(총상금 10억원)에서 3차 연장 접전 끝에 우승한 8월 18일. 대회 코스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더헤븐 컨트리클럽에서는 특별한 우승 세리머니를 준비했다. 클럽 내 리조트의 인피티니풀에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의 메이저 대회 셰브론 챔피언십과 비슷하게 우승을 차지한 선수가 캐디, 가족 등과 함께 물에 뛰어드는 퍼포먼스를 한 것.
배소현과 함께 물에 들어간 이는 이시우 코치와 캐디 이승하씨. 기분 좋은 표정으로 몸을 던진 배소현은 “더운 날씨였는데 풀장에 들어가니 시원하고 아주 좋더라”며 “대회를 앞두고 (우승자가 입수한다는) 공지가 전달됐고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가야지’ 생각에 여벌의 옷을 준비했다. 컷 통과할지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승하면 빠져야 한대요’라고 장난치면서 기분 좋게 대회를 치렀다”며 즐거워했다. 1993년생인 배소현은 아마추어 골프 국가대표 코치였던 아버지 배원영(2019년 별세)씨를 따라 클럽을 쥐었다. 2011년 KLPGA 프로가 된 배소현은 6년간 2·3부 투어에서 활동하다 2017년 정규 투어에 데뷔했다. 그리고 데뷔 8년 만인 5월 26일 정규 투어 154번째 출전 대회였던 E1 채리티 오픈에서 생애 첫 승을 거뒀다. 배소현은 “아버지가 골프를 가르쳤고 2년 정도 캐디를 해주었다”며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나를 믿었다”고 했다.
진심으로 노력한 결실이 주는 감동의 깊이는 다르지 않다
동료가 가장 부러워하는 건 배소현의 장타 능력이다. 허리 부상 재활 치료를 하면서도 평균 드라이브샷 거리가 2018년 238.03야드(66위), 2022년 243.11야드(24위), 2024년 252.683야드(6위)로 꾸준히 늘었다. 이시우 코치에게 함께 배우는 박현경(24)은 ‘회춘 샷’이라 놀렸다. 배소현의 말이다. “30대 선수가 롱런하려면 비거리가 나가야 한다는 이코치 말에 장타 연습을 열심히 한다. 경기가 없으면 1주일에 5일은 체육관에서 살고, 밸런스와 유연성 운동은 꾸준히 한다.” 배소현은 드라이버로 힘 빼고 치면 235m, 마음먹고 치면 245m 안팎을 찍는다. 방신실과 윤이나 같은 KLPGA투어의 최장타자 바로 다음 수준의 장타다.
7년째 배소현과 함께하는 이 코치도 즐거운 목소리로 옛날 일을 돌아봤다. “고진영 프로와 한두 달 간격으로 우리 팀에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의 능력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KLPGA투어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낙관적이기보다는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노력하는 자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1부 투어에 들어왔지만, 몇 대회 치르지 않은 시즌 초반에 이미 시드전을 걱정할 정도로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비거리가 꾸준히 늘고 4년 전부터 시드전은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순위를 끌어올리면서 몰라보게 자신감이 붙었다. 상금 순위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더라도 ‘내년에 더 좋아지고, 그다음에 또 커리어 하이를 찍죠! 뭐’ 주눅이 들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는 만큼 스윙도 시원하게 휘둘렀다. 그만큼 또 거리가 늘었다. 지난해 하나금융 챔피언십 2라운드에서 배소현과 함께 라운드한 리디아 고(27)가 ‘언니 드라이버 샷 매우 좋다. 정말 부럽다’고 할 정도였다. 배소현은 리디아 고의 쇼트 게임과 아이언 샷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천재 소녀’로 출발해 화려한 경력을 쌓고 올림픽 금메달로 LPGA투어 명예의 전당 입성을 완성한 리디아 고는 파리 올림픽에 가기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나흘간 이 코치와 특별 훈련을 했다. 이 코치는 “전혀 다른 성장 과정이지만 진심으로 노력해서 결실을 보는 선수가 주는 감동의 깊이는 다르지 않다”고 했다. 리디아 고는 이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AIG여자오픈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은 있다
배소현은 첫 우승 후 다시 흔들리는 시간이 있었다. 두 번째 우승을 앞두고 네 차례 대회에서 세 번이나 컷 탈락했다. 한 번 우승했다고 저절로 다음에도 잘 치지 못한다. 골프는 이렇게 늘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다.
이렇게 흔들리는 배소현의 마음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오빠와 재즈 보컬 트레이너인 새언니가 잡아주었다. “골프가 다시 잘 안돼서 걱정이라고 하자, 새언니는 무엇이 문제인지 노트에 적어보라고 했다. 다 적어놓고 보니 막연한 불안감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예선에서 떨어지고 주말에 연습장에 갔다가 만난 고마운 팬 이야기도 했다. “나를 알아보고 ‘2부 투어 때부터 팬이었다, 올해 우승하고 좋은 성적 거두는 걸 보면서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사람마다 꽃피는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시기가 온 것 같다’고 해줘서 감사했다”고 한다.
배소현은 30대가 되면 투어 생활을 마무리하는 선수가 적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매우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다. 여자 선수가 특히 선수 생명이 짧다. 내 생각에골프는 다른 스포츠보다는 본인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다면 꽤 길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수 생활하는 걸 좋아하고 길게 하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것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했고 체력이나 비거리 등 조금씩 아쉬운 걸 채워 나갔다. 다른 선수와 비교할 수 없지만, 투어에서 활약 중인 (안)선주, (박)주영 언니 등을 보며 따라가고 있다. 당장 성적이 안 나와 고민하는 후배가 있다면 나를 보며 따라왔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배소현은 “골프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하는 만큼 되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면서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아도 꾸준히 결과를 얻어 나가면서 좋아지는 사람도 있으니 나를 보면서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