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르 사무라이’ 속 알랭 들롱.
/사진=‘르 사무라이’ 스틸
영화 ‘르 사무라이’ 속 알랭 들롱. /사진=‘르 사무라이’ 스틸

알랭 들롱이 8월 18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이 남자로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알랭 들롱. 알랭 들롱은 눈부신 필모그래피와 함께 패션사에 영원할 전설적인 패션 신(scene)을 남겨왔다. 리넨 셔츠와 로퍼, 미니멀 슈트, 트렌치코트, 선글라스 등 입는 것마다 걸작이 되게 했던 세기의 패션 아이콘. 알랭 들롱이란 이름의 타임리스 클래식을 만나본다.

엄격한 '슈트룩' 파괴한 스타일링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에서 톰 리플리를 연기한 알랭 들롱. ‘태양은 가득히’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쓴 심리 스릴러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1999년 맷 데이먼, 주드 로, 귀네스 팰트로 주연의 ‘리플리’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영화 속에는 신분 상승을 꿈꾸는 톰 리플리가 친구이자 방탕한 부잣집 아들 필립(모리스 로네)의 옷장과 슈트 케이스에서 그의 명품 재킷과 로퍼를 몰래 입어보다 들키는 장면이 있다. 옷장에 걸려 있는 옷을 보면 구찌 패션쇼의 백스테이지를 보는 듯하다.

‘태양은 가득히’는 프랑스 영화이고 소설 속에서 필립과 톰 리플리는 미국인이지만, 이 모든 사건이 펼쳐지는 배경은 소설 속에서 허구의 장소로 창조된 이탈리아 몬지벨로(Mongibello)다. 촬영지는 이탈리아의 작은 섬 이스키아(Ischia)였다. 영화의 배경이 이탈리아 지중해 휴양지이고 부잣집 아들 필립이 당시 최고의 패션 트렌드를 추구하는 멋쟁이였던 만큼 영화 전반은 이탈리안 클래식의 정수를 펼친다.

톰 리플리가 필립을 살해한 후, 그는 죽은 친구의 호사스러운 옷장에서 사치스러운 옷을 꺼내 입고 다닌다. 그중에서도 전설이 된 유명한 패션 신은 평소 연모했던 필립의 여자 친구 마르주를 만나 나폴리로 데려갈 때 톰 리플리의 패션이다. 멋진 화이트 피케 셔츠를 입고 있는데, 가슴이 많이 드러나도록 위쪽 단추 두 개 를 풀었다. 소매 단추도 풀어서 소맷단을 말아 올렸다. 그 위에 근사한 그레이 슈트를 입었지만, 대부분의 영화 시퀀스에서 톰 리플리는 슈트 재킷을 입지 않고 있다. 어깨에 걸치거나 접어서 팔에 걸쳐 들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한 슈트 애티튜드지만, 당시 엄격했던 영국식 슈트 룩을 자유롭게 파괴한 스타일링이다. 톰 리플리 룩은 그 이후 수많은 패션 스타일링과 영화의 패션 신에 영향력을 끼쳤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들롱이 보여준 톰 리플리 룩은 럭셔리 리조트 웨어의 교과서가 됐다. 화이트 리넨 셔츠, 세일러(sailor·선원) 스타일의 반바지, 클래식한 보트 슈즈(선원이 갑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 밑창을 단 신발)를 착용한 이 여유로운 리조트 웨어는 지중해 휴양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1 영화 ‘시실리안’ 속 알랭 들롱. 사진 ‘시실리안’ 스틸 2 영화 ‘태양은 가득히’ 속 알랭 들롱. 사진 ‘태양은 가득히’ 스틸  3 영화 ‘수영장’ 속 알랭 들롱. 사진 ‘수영장’ 스틸
1 영화 ‘시실리안’ 속 알랭 들롱. 사진 ‘시실리안’ 스틸 2 영화 ‘태양은 가득히’ 속 알랭 들롱. 사진 ‘태양은 가득히’ 스틸 3 영화 ‘수영장’ 속 알랭 들롱. 사진 ‘수영장’ 스틸

무심한듯 세련된 '프렌치 시크'

‘태양은 가득히’의 우아한 리조트 룩은 1969년 영화 ‘수영장(La Piscine)’에서 다시 한번 알랭 들롱 패션의 레전드가 된다. 영화 ‘수영장’은 프랑스 리비에라를 배경으로 한 복잡한 심리 스릴러다. 등장인물 간 팽팽한 긴장감과 감정적 충돌을 섬세하게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미와 미장센만큼이나 패션 영향력도 컸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가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의 ‘나폴리 시크’라면, 영화 ‘수영장’은 프랑스 남부 휴양지의 ‘리비에라 시크’라 할 수 있다. 나폴리와 리비에라 모두 천국 같은 지중해의 축복을 받은 고급 휴양지다. 영화 ‘수영장’에서 알랭 들롱은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여름 리조트 웨어의 정수를 다시 펼친다. 화이트 리넨 셔츠, 네이비 반바지 그리고 그 유명한 오버사이즈 선글라스까지 모든 것이 우아하고 완벽하다. 영화 속에서 알랭 들롱의 수영복 스타일은 당시 빅 트렌드가 됐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알랭 들롱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된 오버사이즈 선글라스를 빼놓을 수 없다. 큰 프레임의 선글라스로 알랭 들롱은 미스터리하면서도 매혹적인 매력을 빛냈다.

그리고 1967년 영화 ‘르 사무라이(Le Samourai)’의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도 있다. ‘르 사무라이’는 프랑스 느와르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알랭 들롱은 살인 청부업자 제프 코스텔로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창조해 냈다. 알랭 들롱은 암울하고 건조한 도시 파리의 한 단칸방에서 슈트를 입은 채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운다. 그는 곧 일어서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눌러쓴 채 방을 나선다. ‘사무라이보다 고독한 자는 없다. 만약 있다면 정글의 호랑이 정도일 것이다’라는 오프닝 문구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고독한 킬러 영화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트렌치코트, 중절모, 외로움, 고독, 말 없는 과묵함 등 우리가 지금 ‘킬러’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이미지나 장면이 ‘르 사무라이’의 알랭 들롱을 통해탄생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킬러의 아이콘이 된 주윤발 주연의 ‘첩혈쌍웅’도 영화 ‘르 사무라이’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다.

1969년 영화 ‘시실리안(Le Clan Des Sicil-iens)’과 1970년대 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Borsalino)’에서도 알랭 들롱은 또 다른 프랑스 느와르 패션을 레전드로 남겼다.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와 펠트 모자로 갱스터 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알랭 들롱은 ‘옴므 파탈’의 시초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는 아름다운 동시에 남성적이었고 할리우드 스타와 다른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다. 그의 패션 역시 영국계나 할리우드 스타와 다른 차원의 무심한듯 스타일리시한 ‘프렌치 시크’의 독특한 매력을 빛낸다. 어떤 수식어로도 정의될 수 없는 알랭 들롱만의 클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세기의 아이콘이 세상을 떠나고 영원한 스타일을 남겼다.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현 케이노트 대표, 전 보그 코리아 패션 디렉터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현 케이노트 대표, 전 보그 코리아 패션 디렉터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