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강주 55도(이하 이강주 55도)가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드는 느낌에 놀랐다. 농밀하면서도 부드럽고, 깊이 있는 여운(finish)과 감칠맛까지 갖춘 술이다. 후미에서는 이강주 특유의 스파이시함이 느껴지며 반전 묘미를 보여주는데, 묘하게 중식(중국 음식)이 떠오른다(이강주 55도와는 중식이 어울릴 것 같다).”(대동여주도 이지민 대표의 이강주 55도 시음 평)
조정형(전주이강주 회장) 명인이 55도 신제품을 내놓았다. 이강주는 25도 제품이 주력 제품이며, 수출용으로 38도 제품이 있으나, 55도 제품은 그동안 만들지 않았다. 조 명인은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안동소주, 문배술과 함께 1세대 민속주 지정 명인으로서, 유일하게 아직 현역에서 술을 빚고 있는 ‘전통주 업계 맏형님’이다. 1941년생이니, 올해 여든셋이다. 조 명인이 최근 기자에게 시음용으로 보내준 이강주 55도를 서울 시내 한 중식당에서 지인들과 함께 맛봤다. 이강주는 배, 생강, 울금, 계피를 부재료로 사용한 술이다. 55도 신제품에는 배를 비롯한 부재료가 25도 제품보다 10~20% 더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55도 이강주는 첫 모금만으로도 배, 생강 향이 확 하면서 입안 전체를 감쌌다. 뒤따라 알코올 향이 느껴졌지만, 55도의 ‘무게’는 아니었다. 그만큼 부드러웠다. 오랜 숙성 덕분이다. 전주이강주 25도는 1년 숙성이 기본이다. 55도 신제품은 5년을 숙성했다고 하니, 오랜 숙성에서 오는 깊이와 부드러움은 ‘이런 술이 한국에 또 있나?’ 싶을 정도로 독보적인 풍미를 자랑했다. 같이 맛을 본 일행 중 한 사람은 “최고급 중국 백주를 마시는 느낌”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55도 이강주는 패키지 디자인부터 예사롭지 않다. 초승달 모양을 한 ‘금잔 달병 세트(500㎖)’, 사각 도자기 병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그려져 있는 ‘금주전자 세트(700 ㎖)’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금도금을 한 금잔 두 개가 세트에 들어있는 것도 이전 명절 선물 세트와도 다르다. 금주전자 세트에는 금잔 두 개, 잔 받침 두 개, 금주전자 한 개가 들어있다.이강주 55도를 금주전자에 따라서, 금잔에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외 고급술 시장과 명절 선물 시장을 염두에 둔 제품인 듯싶었다. 금잔과 금주전자에는 순금도 일부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강주를 25도 전주 주력으로 생산, 판매해 온 조 명인은 알코올 도수를 크게 높인 55도 신제품을 왜 개발했을까. 또, 25도의 두 배가 넘는 알코올 도수인 이강주 55도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전주이강주 본사(전북 전주시 덕진구 매암길 28)로 차를 몰았다. 서울에서 약 세 시간 걸렸다.
이강주 55도는 해외 겨냥한 신제품
“이강주는 25도가 맞아. 식사와 함께 마시기에도 적당한 알코올 도수이기도 하고. 그런데 해외로 나가봤더니 25도 술은 술 취급을 않는 나라가 꽤 있더라고. 러시아를 비롯해 동유럽에서는 40도 이하 술은 찾아보기도 어려워. 그래서 오래전에 38도 이강주를 수출용으로 내놓았는데, 그 도수로도 모자란 듯해서, 이번에 이강주 55도를 새로 개발한 거지. 55도 정도 되면 어디에 내놓아도 알코올 도수가 밀리지 않지. 또, 외국의 어떤 술과 비교해도 이강주만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술은 드물어. 해외 명주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자부해. 국내 명절 선물 시장도 염두에 두었고. 올 추석에 ‘빅 3’ 백화점에는 소량이나마 금주전자 55도 이강주 제품을 내놓을 작정이야. 금주전자 세트는 일 년 생산량이 150병밖에 안 돼. 시장 반응이 좋다고 공장에서 마구 찍어낼 수 있는 제품이 못 돼. 외부에 제작을 맡긴 금주전자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개 정도밖에 못 만든다고 하네.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는 얘기야.”
조 명인은 이강주 55도 신제품은 해외 명주 시장을 겨냥해 개발한 제품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강주는 국내 매출이 30억원을 넘어섰지만, 해외 매출은 아직 1억~2억원 안팎인 수준이다. 조 명인은 특히 유럽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3월에 열린 독일 프로바인(세계 최대 규모 주류 박람회) 행사에는 직접 참가해, 해외 바이어와 만났다.
대리점 개설도 속도를 내고 있다.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 독일에도 대리점 계약을 맺었고 최근에는 런던에 2호점을 개설했다.
민속주 업체 전주이강주는 조정형 회장, 이철수 사장 ‘듀엣 경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조 명인은 “국내 생산과 영업은 이철수 사장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고, 제품 개발과 수출 업무만 아직 내가 맡고 있다”고 말했다. 조 명인의 대학 후배인 이 사장은 2016년부터 전주이강주 사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전주이강주 ‘전수자(전수 학생)’ 과정을 밟고 있다. 조 명인은 “이 사장이 부임하고 나서부터 국내 매출은 껑충 뛰었는데, 수출은 아직 적자라서, 오너인 내가 직접 챙기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매출을 지금의 열 배인 10억원 이상으로 올릴 작정이며, 현재 가동하고 있지 않는 제2 공장을 수출 전용 공장으로 리뉴얼할 계획도 갖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55도 제품은 개발에 얼마 걸렸고, 시제품은 얼마나 만들었나.
“본격 개발 기간은 1년 걸렸다고 보면 되는데, 사실 이미 5년 전부터 블렌딩 원액(소주 원액에 여러 가지 침출 원액을 섞은 것)을 숙성해왔기 때문에 5년 전부터 준비가 시작됐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침출 원액 비율을 조금씩 달리한 시제품은 최소 100개 이상을 만들어 맛봤다. 배, 생강 같은 부재료는 해마다 작황이 똑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강주에 들어가는 함량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때그때 함량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55도 제품은 25도 제품보다는 부재료 함량이 높아 과일, 약재 향이 훨씬 진한 반면, 오랜 숙성으로 풍미 역시 한결 부드럽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짚어보는 이슈가 ‘막걸리 첨가제’다. 최근 정부는 주세법 개정을 통해 막걸리에 향과 색소 첨가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조치는 류인수 한국술문화연구소장을 비롯한 전통주 전문가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막걸리의 첨가제 허용은 전통주 근간을 흔드는 조치” 라는 것이다. 그동안은 향과 색소를 넣은 막걸리는 막걸리가 아닌 기타 주류로 분류돼, 막걸리 표시를 못 하고 주세도 여섯 배 높게 매겼다. 그런데 규제 완화 차원에서 앞으로는 색소, 향료 첨가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인공적인 향, 색소가 아닌 천연 재료를 수년간 숙성해 만든 술이 이강주다. 인공 첨가물을 넣는 경우와는 비교가 안 되게 제조원가가 비싸고, 생산기간도 몇 년이 더 걸리는 게이강주다. 재료, 시간, 정성을 아끼지 않은 대표적인 전통주를 말하자면 전주이강주가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이강주 55도 신제품 패키지인 사각 도자기병 개발에도 1년이 걸렸다던데.
“이강주 55도 향과 풍미에 어울리는 패키지 디자인에 공을 많이 들였다. 사각 도자기 병은 완성하려면, 가마에 세 번 구워야 한다. ‘제품에 책임을 지는 동시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도자기 병에 내 얼굴을 직접 넣었고, 숫자(넘버링)도 스티커 붙이지 않고 새긴 뒤 한 번 더 구웠다. 이러다 보니, 세 번을 구워야 도자기 병이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숱한 실패 과정을 거치다 보니,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최근 금값이 많이 올랐다는데.
“금잔과 금주전자에는 순금이 일부 들어간다. 그런데 금값이 시나브로 오르지 않았나. 그래서 세트 가격이 다소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올해는 이 가격을 유지했지만, 내년에는 세트 가격이 더 오르지 않을까 우려된다. 술 가격이 오르는 게 아니라, 금잔과 금주전자에 들어가는 금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이강주 55도는 5년 숙성해 완성하는 술뿐 아니라, 패키지(술병) 개발에도 여간 정성을 기울인 게 아니다. 달병 세트와 금주전자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금잔에는 전주이강주 글자를 음각으로 새겨, 이강주 55도 술을 다 마신 뒤에 장식용으로도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했다. 금주전자 세트에 있는 사각 도자기 병에는 조 명인의 얼굴 사진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그만큼 이 술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표시다. 조 명인은 “이강주 55도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