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타이타닉’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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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푸른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괜찮아요. 당신만 날 사랑한다면’.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강직인간증후군이라는 희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옹이 병마를 잠시 떨치고 나와 ‘사랑의 찬가’를 부를 때였다. 그래서 다시 보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의 최고 히트곡 ‘My heart will go on(내 사랑은 영원할 거예요)’의 영화 ‘타이타닉’을.

1912년 4월 10일. 승객과 선원 2200여 명을 태운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던 중 빙산과 충돌, 15일 새벽에 침몰했다. 구조 신호를 받고 달려온 카르파티아호가 866명을 구조했지만, 더 많은 이는 차가운 바다에서 실종, 사망했다. 그때 타이타닉에 탄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죽음이 예정되기까지 그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가난한 화가, 잭은 포커판에서 타이타닉 삼등실 티켓을 딴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기회를 움켜쥔 잭은 인생 최고의 행운에 들떠서 배에 오른다. 나흘 뒤 차가운 바다에 수장될 걸 알았다면 타지 않았겠지만, 만약 백 년을 산다 해도, 열 번을 다시 태어나도 얻지 못할 최고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누군가 예언해 주었다면, 승선을 간단히 포기할 수 있었을까.

로즈는 특등실 승객이었다. 철강 부호의 후계자, 칼의 약혼녀였지만 몰락한 가문을 위해 그녀의 어머니가 강제한 결혼이었다. 로즈는 칼을 사랑하지 않았다. 결혼을 조건으로 어머니와 자신이 입고 먹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주는 남자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건 그녀의 단단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어두운 밤, 그녀는 방을 뛰쳐나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 숨도 쉴 수 없게 가슴을 조이는 코르셋과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로즈는 배의 후미에 매달려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를 내려다본다. 여기서 떨어지면 끝낼 수 있다. 난간을 잡은 손을 놓기만 하면 검은 바다가 알아서 이생을 산산이 부숴주리라.

밤하늘 별자리에 그려보던 잭의 미래 속으로 로즈가 불쑥 뛰어든다.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는 로즈를 본 잭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당신이 바다에 빠지면 나도 뛰어내릴 거예요.” 턱시도도 입지 않은 남자의 한마디가 로즈의 가슴에 파도를 일으킨다. 포마드도 바르지 않은 남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헝클어질 때 그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저 남자와 더 이야기하고 싶다. 로즈는 잭의 손을 잡는다.

칼은 로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노력하면 마음을 열어주리라, 기다렸다. 그녀의 집안이 잃어버린 품위와 안전을 보장해 주고 로즈가 좋아하는 그림들도 잔뜩 사주었다. ‘대양의 심장’이라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선물했다. 그가 주는 건 하나도 거절하지 않으면서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뱅이 잭의 품에 그녀가 안겼다는 걸 알았을 때, 칼의 절망과 질투는 분노와 살의로 바뀐다.

‘타이타닉’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타이타닉’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잭과 로즈, 칼의 삼각관계가 복잡하게 꼬여가는 동안에도 타이타닉은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선주와 제작자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안전한 배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목에 걸고 갑판 위를 기린처럼 걸어 다녔다. 선원들도 최고급 여객선에 고용됐다는 자긍심으로 팽팽해진 가슴을 쫙 펴고 일했다. 승객들은 일등실과 삼등실의 구분 없이, 타이타닉이 데려다 줄 세상에서 다시 시작될 삶에 대한 기대로 마음 설렜다.

이만하면 됐다는 만족은 없는 걸까. 튼튼하고 멋진 배를 자랑하던 사람들과 은퇴를 앞두고 처녀 출항한 배를 책임진 선장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배라는 왕관도 쓰고 싶었다. 선장은 전속력 항해를 명령했다.

배 밑에서 인부들은 열기를 견디며 쉼 없이 석탄을 밀어 넣었다. 수많은 기계 장치가올라가고 내려가며 열을 뿜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크고 무거운 배는 가라앉지 않을 수 있었다. 건조되고 처음 출항한 배는 신이 나서 달렸다. 너무 잘 달렸다. 그래서 빙산을 발견하고도 멈출 수 없었다.

조금 천천히 달렸더라면. 좀 더 겸손하게 숨을 고르고 별을 보며 바다의 노래에 귀 기울였다면. 무엇보다 규정대로 구명정을 실었더라면.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배는 기울었고, 침수됐고, 너무 빨리 가라앉았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사회 어디서나 그렇듯 자기만살겠다고 남들을 밟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사실과 허구를 섞어 재난 속에서 피어난 사랑, 비명이 난무하는 공포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인간의 척추를 꼿꼿이 세울 줄 알았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데 주력한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두려움에 빠진 승객들을 위로하며 끝까지 악기를 놓지 않은 연주자들, 남편과 함께 죽겠노라, 구명보트를 거부한 노부인, 비굴하게 도망가는 대신 떳떳하고 겸허하게 최후를 맞이한 신사들.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를 먼저 구명정에 태웠고 선원들은 신분과 빈부 차별 없이 더 많은 승객을 구하려고 애썼다. 책임자들은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죽음의 파도가 몰아친 시간에도 잭과 로즈는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날 믿어요?” 잭이 물었다. “당신을 믿어요.” 로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은 살아남아 행복할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로즈는 잭을 믿었고 오래오래 살아남아 약속을 지켰다.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을 때, 명절에TV로 반복해 볼 때마다 바다 깊이 잠들어 있는 목걸이가 아까웠다. 아니 왜 저걸? 팔면 돈이 얼만데. 박물관에라도 기증할 것이지.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속이 쓰렸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지금, ‘My heart will go on’을 듣고 있자니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을 다이아몬드가 흐뭇하다.

사랑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보석도 그 사랑을 대신하지 못한다. 비로소 사랑을 좀 알게 된 걸까. 혹시 나이를 헛먹고 뒤늦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된 건 아닐까. 

김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