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모양의 디캔터는  와인 마시는 분위기와 재미를 더해준다. /셔터스톡
아름다운 모양의 디캔터는 와인 마시는 분위기와 재미를 더해준다. /셔터스톡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와인바나 레스토랑에서 프리미엄 또는 올드 빈티지 와인을 주문하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디캔팅(decanting)을 해드릴까요.” 디캔팅이 무엇인지 모르면 대답하기가 퍽 난감하다. 뭘 해준다는 거지? 무료로해주는 서비스인가? 머릿속에 온갖 질문이 빛의 속도로 펼쳐지지만 물어보기가 쑥스럽다. 디캔팅이란 와인을 병에서 디캔터(de-canter)라는 빈 용기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디캔팅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오래 숙성된 와인의 찌꺼기를 거를 수 있고, 와인의 맛과 향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디캔팅을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주의할 점은 있다. 디캔팅의 과학과 미학(味學)적 측면에 대해 알아보자.

찌꺼기도 거르고 분위기도 잡고

디캔팅의 시작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와인을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커다란 항아리에 넣어 두고 작은 용기에 덜어 마셨는데 이것을 디캔팅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여과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터라 와인에 찌꺼기가 많았지만, 찌꺼기는 항아리 바닥에 점차 가라앉으므로 윗부분만 살살 뜨면 맑은 와인을 디캔터에 담을 수 있었다. 로마 시대에 들어 유리 세공 기술이 발달하자 디캔터의 모양도 발전해, 귀족의 입은 물론 눈도 즐겁게 해주었다. 중세 시대에 잠시 주춤하던 유리 세공은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부활했고 17세기 이후부터 유럽의 상류층은 아름다운 디캔터로 자신들의 부와 세련된 안목을 과시했다.

요즘 와인은 대부분 여과를 거치고 병입되기 때문에 찌꺼기가 거의 없지만 올드 빈티지 와인 중에는 디캔팅이 필요한 것이 있다. 찌꺼기는 와인 속에 고루 퍼져 있던 타닌과 색소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뭉쳐, 와인에 녹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입자가 커지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에서, 피노 누아(Pinot Noir)처럼 색이 연하고 타닌이 적은 와인보다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처럼 색이 진하고 타닌이 많은 와인일수록 찌꺼기가 더 잘 생긴다. 몸에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입안에 들어오면 거칠고 쓴맛이 나므로 이왕이면 찌꺼기는 제거하고 마셔야 와인을 더욱 깔끔하게 즐길 수 있다.

와인 중에는 맛과 향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일부러 여과하지 않고 병입한 것도 있다. 그런 와인으로는 빈티지 포트(vin-tage port)가 대표적이고 프리미엄 와인 중 레이블에 ‘unfiltered’ 또는 ‘unfined’라고 적힌 것도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와인은 오래 숙성되지 않아도 찌꺼기가 잘 생기므로 와인병을 미리 세워 찌꺼기를 충분히 가라앉힌 뒤 조심스럽게 열고 맑은 윗부분만 디캔터로 옮겨 마시는 것이 좋다. 

디캔팅할 때 촛불을 켜서 병목 부분을 밝게 비추기도 하는데, 이는 와인병 색이 진해 찌꺼기가 어디쯤 왔는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제법 낭만적이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 와인 마시는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와인을 디캔터에 부을 때는 디캔터의 안쪽 벽면을 타고 와인이 천천히 흘러 들어가도록 한다. /셔터스톡
와인을 디캔터에 부을 때는 디캔터의 안쪽 벽면을 타고 와인이 천천히 흘러 들어가도록 한다. /셔터스톡
찌꺼기가 어디쯤 왔는지 보기 위해 병목 부분을 촛불로 밝히며 디캔팅한다. /셔터스톡
찌꺼기가 어디쯤 왔는지 보기 위해 병목 부분을 촛불로 밝히며 디캔팅한다. /셔터스톡

맛과 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브리딩 효과

디캔터는 와인의 맛과 향을 증폭시키는 데도 사용된다. 와인은 병 밖으로 나와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산화가 시작되면서 타닌이 부드러워지고 아로마가 풍부해진다. 이 과정이 와인이 숨을 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브리딩(breathing)’이라고도 한다. 

디캔터 중에 목이 좁고 길며 아랫부분이 널찍한 것이 브리딩 효과를 내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다. 브리딩은 병 숙성이 충분치 않아 아직 맛이 절정에 오르지 않은 프리미엄와인을 일찍 마셔야 할 때 주로 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데일리 급 와인도 브리딩하면 훨씬 풍성한 향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와인 애호가 중에는 브리딩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와인을 잔에 조금씩 따르면서 천천히 즐기면 꽃이 피어나듯 와인 맛이 서서히 변하는 모든 과정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리딩은 필수라기보다 취향과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다.

디캔팅에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영 빈티지에 비해 향이 무척 섬세해서 디캔터에 부어 한꺼번에 공기에 노출되면 맛이 순식간에 꺾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아껴왔던 와인을 열 때는 잔에 조금 따르고 스월링해서 맛을 본 뒤 시간이 지나도 향이 좀처럼 피어나지 않는다고판단될 때 디캔팅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디캔터도 폭이 넓은 것보다는 좁은 것을 선택해 와인과 공기의 접촉이 서서히 진행되도록 해야 안전하다. 

레드, 화이트, 스위트 등 모든 와인은 브리딩을 통해 아로마가 풍부해지므로 디캔터 하나 장만해 두면 와인을 맛있게 즐기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단, 기포의 청량감을 즐기는 스파클링 와인만은 예외다. 디캔터를 구입할 때는 용량 확인이 중요하다. 가격만 보고 덜컥 저렴한 것을 고르면 용량이 너무 적어 브리딩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와인 한 병이 750이므로 넉넉하게 1.5L 이상인 것을 선택해야 와인이 디캔터 안에서 넓게 퍼지면서 공기와 접촉이 활발해진다.

디캔터에 와인을 따를 때는 한꺼번에 쏟아붓지 말고 와인이 디캔터 안쪽 벽면을 타고 조금씩 흘러 들어가도록 천천히 부어 주어야 한다. 와인이 디캔터에 들어갈 때 공기와 더 많이 닿을수록 브리딩이 더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와인을 마실 때는 디캔터까지 챙기기가 번거롭기 마련이다. 이럴 땐 더블 디캔팅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더블 디캔팅이란 와인을 디캔터에 부었다 다시 병으로 옮겨 담는 것을 말한다. 외출하기 1~2시간 전에 와인을 디캔팅해두었다 나가기 전에 병에 도로 담고 코르크로 막아서 가지고 가면 맛과 향이 풍성하게 피어오른 상태의 와인을 바로 즐길 수 있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