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봄의 정원’, 1884.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 ‘봄의 정원’, 1884. /위키피디아
정철훈 미술칼럼니스트고려대 대학원 문화콘텐츠 박사 수료, 소장전 ‘리틀 사치전’ 개최
정철훈 미술칼럼니스트
고려대 대학원 문화콘텐츠 박사 수료, 소장전 ‘리틀 사치전’ 개최

한가위 추석은 우리에게 고향과 가족에 대한 단상을 늘 전해준다. 빈센트 반 고흐도 남달리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작가였다. 지난해 9월 네덜란드의 한 미술관이 도난당한 반 고흐의 그림을 3년 만에 되찾았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반 고흐가 부모와 살았던 고향인 네덜란드 뉘넨의 목사관 정원의 풍경을 담은 작품 ‘봄의 정원(1884)’이다. 그림의 중앙에 등장하는 교회 첨탑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이 시기 반 고흐는 고향에서 화가로서 자신의 기량을 다듬어 가고 있었다. 그가 고향에서 특히 관심을 가진 주제는 농민의 일터와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진실한 묘사였다. 이삭줍기, 파종 등 농부들의 일상을 탐구하고, 그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화가로서 자신의 기본기를 다듬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삶의 본질이 그림에 투영되길 원했다. 이런 다양한 시도와 탐구를 통해 마침내 그가 자신 있게 완성한 작품이 ‘감자 먹는 사람들(Potato Eaters·1885)’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 자신이 실력 있는 화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구를 거치면서 실존적인 농민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이다. 고향에서 직접 농민과 생활하며, 현실감 있는 노동 현장을 그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의 모습은 인상파의 여느 그림처럼 예쁜 그림이 아니다. 어둡고 칙칙한 흙빛의 장면을 통해 생생한 농민의 생활과 진실한 현실을 그림에 투영하고자 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린 시간보다는 농민의 본질적인 모습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라고 적기도 했다.

그는 본 그림에 앞서 습작 그림을 먼저 그렸다. 습작에는 부부와 자녀로 추정되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어두운 배경 속에 중앙 램프의 밝은 빛을 중심으로 네 명의 인물이 앉아서 식탁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먹고있는 장면이다. 얼굴색은 램프 불빛을 반영하여 밝은색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인상파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처럼 얼굴 윤곽은 뭉개져 있다. 디테일 없는 준비 단계의 그림으로, 명작을 위한 설계의 기본적인 개념을 설정한 작품이다.

반 고흐는 철저한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고 습작을 거쳐 명작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했다. 그런 만큼 작품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강했다. 동생 테오에게 그림을 여러 번 설명하면서 그림이 파리에서 성공적인 평가를 받길 원했다. 하지만 당시의 파리 화단은 밝은 계열의 인상파 그림이 선호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전시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지인이던 화가마저 그림에 혹평을 가함으로써 반 고흐를 우울하게 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 친구 화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감자 먹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위키피디아

이 작품에서는 중앙의 빛을 내는 램프가그림의 색상을 표현하는 포인트다. 흔히 인상파를 ‘빛의 화가들’로 부르듯이 램프의 빛은 인물의 얼굴색을 밝게 만들어 배경의 어두운 분위기와 대조되는 강한 인상을 제공하는 장치다. 얼굴의 흰색처럼 보이는 부분은 실제로는 회색이다. 그리고 배경의 색상은 회색, 갈색, 녹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갈색이나 녹색도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연구를 토대로 ‘보색(서로 반대되는 색)’ 을 사용했다. 두 가지 보색을 혼합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색을 표현한 것이다. 모자의 회색 속의 분홍색은 보색끼리 양을 조절해 다른 색깔의 느낌으로 나타나게 했다. 왼쪽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대해 보면 오후 7시를 나타내고 있고, 옆의 액자에는 종교적인 기원을 담은 듯한 십자가를 그린 모습이 보인다. 인물들은 고된 농민의 일과를 마치고, 경건한 복장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먹고 있다. 그리고 램프의 빛을 이용하여 희미하게 감자에서 나는 김을 연기처럼 묘사하고 있다. 차를 따르고 있는 여성의 머리 위에는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수저통과 부엌 도구가 걸려 있다.

이처럼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가 인물과 색상의 연구를 통해서 농민의 신성한 저녁 식사를 표현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순수한 눈망울과 젊은 부부의 정겨운 이야기를 통해서 고된 노동 뒤에도 인간적인 모습이 살아 숨 쉬는 실존적 농민의 희망적 일상을 담은 작품이다.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을 자신의 가장 성공적인 명작으로 평가하며,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감자 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위해 자신의 농민 그림을 보내달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사망하던 해에 ‘감자 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남겼다.

고향 사람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위해 동생에게 농민 그림을 보내달라고 할 즈음인 1889년 폴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을 그린다. 반 고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관찰과 상상을 연결해 그린 작품이다. 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사이프러스 나무와 연결되고, 역동적인 밤하늘과는 대조적으로 마을은 평온하다. 교회 첨탑은 그의 네덜란드 고향의 첨탑과 닮아있다. 병실에서 바라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죽음을 연상시키고, 교회 첨탑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의 작품과 다른 점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그림에 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운송료를 절약하기 위해 동생에게 보내지 않은 그림 중 하나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889년 11월 지인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이 작품을 ‘실패작’이라고 언급했다.

반 고흐는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을 남겼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후부터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불과 5년 동안 엄청난 작품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사후 10여 년 후인 1901년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은 동생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어, 영어,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읽고 정리해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과 형제애를 담은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1914)’를 출간하면서 ‘반 고흐 신화’를 창조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400여 점의 작품을 내놓아,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는 드물게 많은 명작을 보유한 반 고흐 미술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요한나가 없었다면 반 고흐도 무명의 화가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반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동생 테오가, 사후에는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반 고흐 신화를 만들 수 있었다. 한가위 추석에 가족의 힘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정철훈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