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들이 복제 모아이에 밧줄을 걸어 옮기고 있다. 모아이를 흔들어 40분 만에 100m를 이동시켰다. /고고과학 저널
고고학자들이 복제 모아이에 밧줄을 걸어 옮기고 있다. 모아이를 흔들어 40분 만에 100m를 이동시켰다. /고고과학 저널
‘네이처’ 표지의 모아이 석상. 라파 누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인구가 급감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표지에 소개됐다. /네이처
‘네이처’ 표지의 모아이 석상. 라파 누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인구가 급감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표지에 소개됐다. /네이처

남태평양에 있는 칠레 라파 누이(Rapa Nui·이스터섬)에는 600여 개의 거대 석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모아이(Moai)다. 영화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 ‘덤덤’으로 나오는 석상이다. 1250~1500년 현지 원주민이 만들었다. 거대 석상을 만들려면 노동력이 풍부해야 한다. 하지만 1700년대 유럽인이 도착했을 때는 원주민이 약 3000명밖에없었다고 기록됐다. 사람들은 라파 누이 사람들이 석상을 만들려다 섬의 자원을 모두 소진해 자멸했다고 생각했다.

덴마크 코펜하겐대와 스위스 로잔대 공동 연구진은 9월 12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DNA 분석 결과를 보면 라파 누이 사람들이 인구 증가로 생태 자원을 소진해 자멸하는 ‘생태학적 자살(ecological suicide)’을 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네이처’ 표지 논문으로 실렸다.

DNA 다양성 확대도 인구 증가 보여줘

라파 누이는 남미 대륙에서 서쪽으로 약 3700㎞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사는 섬과는 동쪽으로 19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외딴섬이다. 이 섬과 주민 모두 라파 누이라고 불린다. 태평양 섬에 살던 폴리네시아인이 1200년쯤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164㎢가 야자수 숲으로 덮여 있었다고 추정된다. 1722년 유럽인이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숲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이 섬의 역사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자원을 얻기 위해 생태계를 파괴해 스스로 붕괴한 생태학적 자살, 에코사이드(ecocide)의 사례로 알려졌다. 덴마크와 스위스 과학자들은 프랑스 파리의 국립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된 인간 유골 15점을 조사했다. 1877년과 1935년 탐험대가 라파 누이에서 수집한 유골이었다. 연구진은치아와 내이 뼈에서 추출한 DNA를 해독해 이들이 오늘날 라파 누이 사람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유골의 주인공들은 연대가 1670년에서 1950년 사이로 나왔다. 연구진은 DNA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분석했다. 인구가 적으면 공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를 많이 공유한다. 인구가 늘면 공유하는 유전자가 감소한다. 즉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한다. 연구진은 DNA 정보를 통계 분석해 라파 누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계속 늘었음을 확인했다. 고대인의 유전자를 보면 1200년 무렵 처음 섬에 정착할 당시 인구 병목 현상의 징후가 있었지만, 그 후 유전적 다양성이 계속 늘어나 섬의 인구는 19세기까지 꾸준히 증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860년대 페루의 노예 사냥꾼이 인구의 3분의 1을 납치했고, 1870년대 천연두까지 창궐해 결국 110여 명만 남았다. 연구진은 또 고대 라파 누이 유골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DNA도 확인했다. 연구진은 두집단이 1300년대 무렵 혼합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폴리네시아인이 처음 라파 누이에 정착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남태평양 라파 누이(이스터섬)에 있는  거대 석상 모아이. 석상을 만들려다 생태계를 파괴해 인구가 급감했다는  기존 이론을 반박하는 연구 논문이 나왔다. /위키미디어
남태평양 라파 누이(이스터섬)에 있는 거대 석상 모아이. 석상을 만들려다 생태계를 파괴해 인구가 급감했다는 기존 이론을 반박하는 연구 논문이 나왔다. /위키미디어

AI로 토양 생산력 추정, 인구 급감 달라

기록에 따르면 1722년 처음 유럽 탐험가가 도착했을 때 라파 누이에는 3000명밖에없었다. 지금까지는 전성기에 1만5000명 수준이던 인구가 거의 붕괴했다고 생각했다. 미국 UCLA의 생물학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이를 생태학적 자살론으로 설명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라파 누이 사람이 모아이 석상을 옮기기 위해 통나무를 베어 바닥에깔았다고 추정했다. 통나무를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로 삼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삼림을 과도하게 벌채하고 토양이 침식됐다. 이로 인해 1만5000명의 인구를 유지할 식량을 생산할 수 없어 인구가 붕괴했다는 것이다.

이번 DNA 분석 결과는 그와 정반대다. 라파 누이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지 인구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카트린 네겔레 박사는 이날 ‘네이처’에 발표한 논평 논문에서 “인구 붕괴설에 종지부를 찍는 연구”라며 “이번에 원주민의 이미지를 바로잡았다”고 평가했다. 어쩌면 라파 누이 인구가 1만5000명 규모였다는 전제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미국 빙엄턴대의 칼 리포 교수는 지난 6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라파 누이의 농업은 4000명 미만만 유지할 수있었다고 밝혔다. 빙엄턴대 연구진은 5년에 걸쳐 라파 누이를 조사하고 인공위성으로 섬 지역을 촬영했다. 인공지능(AI)으로 위성 사진을 분석해 섬의 농경지 면적과 식량 생산량을 예측했다. 모아이를 옮기려고 삼림을 파괴한 것도 아닐지 모른다. 홍콩 과학기술대 기계항공공학과의 서정원 교수는 지난 2022년 ‘미국전기전자공학회(IEEE) 로봇공학 회보’에 “로봇이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흔들거리며 걷는 방식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철사로 모아이처럼 밑이 둥글고 넓은 구조를 만들고 그 위로 기둥을 세웠다. 연구진은 기둥에 줄을 연결하고 로봇팔로 양쪽을 번갈아 당기는 실험을 했다. 그러자 철사 모아이는 뒤뚱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서 교수는 로봇팔 대신 드론 두 대로 같은 실험을 해 역시 모아이를 걷게 하는 데 성공했다.

서 교수의 실험은 앞서 고고학자가 직접 사람 힘으로 `진행한 실험을 로봇으로 더 발전시킨 것이다. 지난 2013년 미국과 칠레 고고학자들은 복제 모아이를 밧줄로 옮긴 실험 결과를 국제 학술지 ‘고고과학 저널’에 발표했다.

사람들이 머리에 감은 오른쪽 밧줄을 잡아당기면 모아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이어 왼쪽 밧줄을 당기면 아랫부분이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앞으로 간다. 당시 18명이 밧줄을 당겨 40분 만에 무게 4.35t의 복제 모아이를 100m나 이동시켰다. 이 연구들은 모두 모아이를 통나무를 깔지 않고 줄로 옮겼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모아이를 만들더라도 생태학적 자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아이가 비극의 시발점이라는 누명을 벗을 길이 열렸다. 

이영완 조선비즈 사이언스조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