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들어 무궁화가 더욱 왕성한 세력을 자랑하는 가운데, 이에 질세라 바로 옆에서 끈질기게 피는 꽃이 백일홍이다. 이름 그대로 장장 100일 동안이나 피었다가 지고 또 핀다.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무궁화와 거의 똑같다. 7월 초에 피기 시작해 9월 현재도 무궁화와 함께 힘찬 기운을 뽐내고 있다. 물론 얼마 뒤에는 이 두 꽃도 힘을 다해 함께 시든다.그때의 쓸쓸한 정경을 북송 초의 안수(晏殊·991~1055)는 ‘청평악(淸平樂)’ 곡조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가을바람 살랑살랑, 오동잎이 하나하나 떨어진다. 갓 익은 푸른 술 처음 맛보니 사람은 쉬이 취한다. 베개 하나 베고 작은 창가에서 깊은 잠을 잤노라(金風細細, 葉葉梧桐墜. 綠酒初嘗人易醉. 一枕小窗濃睡). 백일홍과 무궁화꽃이 시들고, 지는 해는 난간을 비춘다. 짝지은 제비 돌아가려는 시절, 은박 병풍에는 어젯밤 살짝 한기가 들었다오(紫薇朱槿花殘. 斜陽却照闌干. 雙燕欲歸時節, 銀屏昨夜微寒).”
중국 남방이 원산지인 백일홍의 원래 이름은 ‘자미(紫薇)’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중국 고대의 천문학에서 북극성을 ‘자미(紫微)’라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우연히 비슷한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 백일홍꽃의 색깔과 모양을 보고 옛사람이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예부터 사람들은 이 둘을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진의 왕가(王嘉)가 지은 ‘습유기(拾遺記)’ 제9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보인다. 서진 말기 민간의 모든 경작지에 갑자기 쑥대와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나더니 여우와 토끼 등이 몰려와 뛰어다녔다. 천문을 맡은 신하가 “화성이 자미성을 범해서 생긴 변고로 빨리 피하지 않으면 낙양이 없어질 것(熒惑犯紫微, 若不早避, 當無洛陽)”이라고 상주했다. 이에 황제가 화를 피하려는 임시방편으로 도성의 정원과 민간의 모든 경작지에 ‘자미(紫薇)’를 심으라는 조서를 내렸다.
당의 현종(玄宗)은 즉위 초에 중서성(中書省)을 ‘자미성(紫微省)’으로 바꾸고 그 장관인 중서령(中書令)도 ‘자미령(紫微令)’으로 칭했다. 별 중의 으뜸인 북극성의 이름을 최고 권력 기구에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관청 주위에는 자미를 심도록 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미성은 다시 중서성으로 환원됐지만 자미성이란 별칭은 계속 쓰였다.
백거이(白居易)가 어느 날 중서성에서 당직 근무할 때 뜰에 핀 백일홍을 보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칙서 짓는 관청 아래에 글 쓰는 일 잠잠해지니, 종루와 고루 안에서 물시계 소리 길게 울린다. 해 질 녘 홀로 앉아 누구와 짝할까 하는데, 자미화가 자미랑을 마주하고 있구나(絲綸閣下文書靜, 鐘鼓樓中刻漏長. 獨坐黃昏誰是伴, 紫薇花對紫微郎).”
그 뒤 정파 싸움에 휘말려 심양(潯陽)으로 좌천된 그는 조정으로 돌아와 몇 년을 별 탈 없이 보냈다. 그러다가 권세가의 견제로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항주(杭州)와 소주(蘇州) 등의 지방관을 자청했다. 소주에서 그는 또 백일홍꽃을 보면서 다정다한하고 감개무량한 회포를 다음의 시로 나타냈다. “자미화가 자미옹을 마주하나니, 이름은 비록 같지만, 모양은 같지 않도다. 홀로 아름다움 다 차지해 여름 경치 꾸며내고, 그 얼굴색을봄바람에 맡기지 않았구나. 심양 관사의 두 그루 높은 나무, 흥선사 뜰의 크고 무성한 한 그루. 그 모두가 소주의 편안한 곳에서 보는 것과 어찌 같으랴? 꽃 같은 마루의 난간 밑 달 밝은 가운데에서(紫薇花對紫微翁, 名目雖同貌不同. 獨佔芳菲當夏景, 不將顏色托春風. 潯陽官舍雙高樹, 興善僧庭一大叢. 何似蘇州安置處, 花堂欄下月明中).” 세월이 흘러 젊은 시절의 ‘자미랑(紫微郎)’이 이제는 ‘자미옹(紫微翁)’으로 바뀌었다. 백화가 만발하는 봄에 함께 피지 않고 꽃이 드문 여름과 가을에 걸쳐 피는 백일홍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 좌천된 심양의 관사에서도 보고 조정에 있을 때 흥선사(興善寺)라는 큰 절에서도 보았지만, 지금처럼 마음 편히 있는 소주에서 보는 백일홍이 그에게는 가장 아름다웠다. 이상 두 작품 모두 제목이 ‘자미화(紫薇花)’다.
이와 같이 궁중의 최고 관청에 많이 심었다고 해서 백일홍은 어느새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이 됐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문 앞에 한 그루 백일홍을 심으면 집안은 부귀하고 영화롭게 된다(門前種株紫薇花, 家中富貴又榮華)”는 말도 나오게 됐다. 또 남송 때 나온 ‘군방비조(群芳備祖)’에서는 이를 ‘화성(花聖)’이라 추켜세웠다.
오랫동안 피는 백일홍에 대해 남송 초의 양만리(楊萬里·1127~1206)는 다음과 같이 경이로운 마음을 드러냈다. “멍한 듯 취한 듯 바라보니 연약하면서도 아름답구나. 이슬이 누르고 바람이 몰아치자 가지가 유난히 기울어졌다. 열흘 붉은 꽃 없다 누가 말했나? 백일홍은 반년이나 오래 핀다오(似癡如醉弱還佳, 露壓風欺分外斜. 誰道花無紅十日, 紫薇長放半年花).” ‘응로당 앞의 자미화 두 그루가 매년 5월부터 만개해 9월에야 시든다(凝露堂前紫薇花兩株, 每自五月盛開, 九月乃衰)’란 긴 제목의 칠언절구 2수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명(明) 중기의 설혜(薛蕙·1489~1541) 역시 ‘자미(紫薇)’란 오언율시의 전반에서 자신이 관찰한 백일홍꽃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미화는 가장 오래 피니, 백 일 동안이나 흐드러진 모습 보인다. 여름에서 가을을 넘어, 새 꽃이 묵은 가지에 이어 달린다(紫薇開最久, 爛漫十旬期. 夏日逾秋序, 新花續故枝).”
설혜와 동시대의 양신(楊愼·1488~1559)은 시에서 처음으로 ‘자미’를 백일홍이라고 불렀다. 다음의 칠언절구 ‘백일홍(百日紅)’에서다. “오얏 길과 복숭아 계곡 그리고 살구 떨기, 봄이 오니 스물네 방향에서 바람이 분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떨어져 너무나 아깝기로는, 어찌 무늬 고운 난간 옆 백일홍만 하려나(李徑桃溪與杏叢, 春來二十四方風. 朝開暮落渾堪惜, 何似雕欄百日紅)?” 백일홍이 모든 꽃 중에서 으뜸이란 말이다.
이리하여 중국에서도 ‘자미’의 별칭으로 백일홍을 쓴다. 일본에서는 한자 그대로 표기하고 ‘사루스베리(サルスベリ)’라고 읽는다. 백일홍 나무의 껍질이 매우 매끈매끈하여 원숭이도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내린다는 뜻이다. 그 뜻을 그대로 살려 ‘원활(猿滑)’이라고도 표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배롱나무라는 명칭이 많이 쓰인다. 외래종 화초 중에 같은 이름의 백일홍이 있어서 혼동을 피해 원래의 백일홍을 ‘목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꼴이다. 원래의 백일홍은 그대로 두고 외래종 화초를 일본처럼 ‘백일초(百日草)’로 불러야 옳다.
백일홍은 중국 남방이 원산지인 만큼 추위에 약한 편이다. 서울·경기 등 중부 이북에서는 월동이 쉽지 않다. 조선 초기의 강희안(姜希顔·1419~1464)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중국은 관청 안에 많이 심었으나 우리나라의 관청에서는 이 꽃을 본 적이 없고 영남의 근해 지방에서 많이 심었다”고 했다. 결국 추위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다음 기록을 보면 그 사정이 더 확실하다. “도성의 명문 세가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었지만, 최근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거의 다 얼어 죽고 열 그루중 한두 그루만 살아남아 대단히 애석하다.”
오늘날에는 기후의 변화로 중부 이북에서도 조금만 잘 관리하면 노지 월동이 가능하다. 주거단지나 공원 등 곳곳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백일홍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필자도 우거의 마당에 네 그루를 심고 첫해에 방한에 신경을 썼더니 그 뒤로는 특별히 관리 안 해도 잘 버티고 때 되면 꽃을 피운다.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1888~1939)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강희안 이후 4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서울에서 백일홍이 있는 집이 몇 곳이나 될 것인가”라면서 “귀인이 상완(賞玩)하는 목(木)백일홍보다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초(草)백일홍을 사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