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홈쇼핑이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 루시. /롯데홈쇼핑
롯데홈쇼핑이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 루시. /롯데홈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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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루시는 어떻게 지내요? 도통 안 보이네요.”

롯데홈쇼핑이 2021년 선보였던 가상 인간 인플루언서 ‘루시’. 인간 쇼호스트와 모델 자리를 단숨에 꿰찰 것 같았던 루시의 활동이 뜸해졌다. 롯데홈쇼핑에서 쇼호스트로 물건 판매에 나서고 호텔롯데의 호캉스 사진을 올리며 모델로도 활동했던 점을 감안하면 불과 1년 새 활동이 급격히 줄었다. 최근엔 그 흔한 인스타그램 포스팅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5월 이후 새 글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도 1년 전 대비 27%가량 떨어졌다. 최근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13만 명 수준이다. 1만 팔로어를 늘리는 데 들어가는 정성과 비용을 생각하면 뼈아프다는 평가가 많다.

루시의 활동이 뜸해진 건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은 루시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데 힘썼던 이완신 전 대표가 고문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이 전 대표는 롯데홈쇼핑 대표이사와 호텔롯데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루시를 활용한 마케팅에 힘써 왔다. 하지만 이 전 대표가 고문으로 옮기고 난 뒤 루시에게 힘을 쏟아줄 ‘든든한 뒷배’가 사라지면서 회사 내 관심도가 떨어졌다.

롯데지주가 콘텐츠 비즈니스를 강화하고 있지만 루시보다는 2018년 롯데홈쇼핑이 만든 벨리곰에 더 신경 쓰고 있다. 당장 팬덤 규모가 다르고 캐릭터 지식재산권(IP)으로 이미 돈을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벨리곰을 활용한 캐릭터 IP 수익 등 관련 매출은 지난해 기준 160억원으로 추정된다. 벨리곰은 소셜미디어(SNS) 팔로어 수가 총 170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인기다.

비용 문제도 있다. 루시를 한 번 방송에 띄우기 위해서는 수천만원가량의 비용이 들어간다. 루시가 가상 인간 인플루언서로서 수천만원 이상의 매출을 내야만 수지타산이 맞는 셈이다. 한때는 가상 인간 인플루언서를 안착시키면 톱 모델을 기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했지만, 자연스러운 구현 등을 위해선 아직 투자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롯데 관계자는 “앞으로 그 비용은 점차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직은 비용문제가 좀 있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하나 올리는 데도 비용이 들어간다. 디자이너가 붙어서 루시 모습을 구현해 내야 한다. 지난해 9월 롯데홈쇼핑은 근속 연수 5년, 만 4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시행하며 업무 효율성을 꾀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과거엔 둘이 나눠서 하던 일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모델비를 벌어오지 않는 루시에까지 인력을 붙여줄 여력은 없다. 롯데홈쇼핑 관계자는 “가상 인플루언서에 대한 관심이 줄면서 모델로서 루시를 찾는 곳도 줄어서 예전처럼 활동 계획을 짜기 어렵다”고 했다.

롯데홈쇼핑이 루시를 통한 마케팅보다는 회사 핵심 역량을 키우는 데 더 집중하는 상황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새벽 시간 영업정지, 이에 따른 영업손실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끝나면서 외부 활동이 많아지자, 홈쇼핑을 시청하고 구매하는 이들이 줄어든 반면 송출 수수료는 늘면서 본업이 흔들리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가상 인플루언서의 한계도 아직은 명확하다. 최근 쇼호스트들은 실시간 채팅으로 소비자 질문에 바로 답해주고 신뢰와 관계를 맺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방송을 보는 시청자가 구매로까지 이어지려면 소비자와 쇼호스트 간 개인적인 신뢰와 관계 맺음이 중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를 위해 쇼호스트들은 실시간 채팅에 자주 올라오는 번호는 기억하고 이전 쇼핑 리스트까지도 언급해 준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쇼호스트에게 “이번에도 믿고 구매합니다. 지난번에 추천해 주신 니트 정말 예뻤어요”라고 남긴다면 쇼호스트는 “채팅창에 지금 문자 남겨주신 3999님. 얼굴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이번 옷도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 지난번에 청바지도 사신 걸로 기억하는데, 같이 입어보세요” 라며 소통한다.

루시도 루시톡을 통해 일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조 쇼호스트 격인 사람의 역할을 전부 대신하지 못한다고 보는 인식이 많다. 사람 쇼호스트처럼 하려면 역시나 전담 인력이 붙어야 한다. 루시가 누군가의 페르소나(persona·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가 벗었다가 하는 가면)여야만 한다는 뜻이다.

전문가는 가상 인플루언서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려면 일관된 세계관이 갖춰져야 하고 다양한 모션 데이터베이스(DB)가 쌓여야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고 투자는 길게 더 필요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쉽지 않은 경영 선택이다. 강력한 의지가 없고서는 가장 먼저 쉽게 줄일 수 있는 비용으로 판단하기 쉬워서다. IT 업계 관계자는 “과거 사이버 가수 아담도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받았고, 사라졌다”면서 “루시 활동이 뜸해진 것도 인공지능(AI) 시대 거품론의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Plus Point

가상 인간 인플루언서 무엇이 있나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 /네이버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 /네이버

가상 인플루언서란 가상을 의미하는 버추얼(virtual)과 유명인을 의미하는 인플루언서(influencer)의 합성어다.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유명인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가상 인플루언서의 대표 주자는 2016년에 등장한 릴 미켈라(Lil miquela). 미켈라는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19세로 설정됐다. 팔로어는 250만 명 수준. 샤넬이나 프라다, 디올 같은 브랜드가 이미 미켈라를 홍보 모델로 기용했고 2018년엔 ‘타임’이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25인 중 1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매년 100억원이 넘는 수익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디지털 슈퍼모델도 있다. 2017년에 등장한 슈두다. 바비 인형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고 나이는 20세로 설정됐다. 팔로어는 24만 명 수준이다. 국내에서는 2020년에 삼성전자 Z플립 모델로 발탁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발망, 랑방,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 해외 명품 브랜드 모델로 활동한 바 있다. 릴 미켈라와 마찬가지로 2018년 ‘타임’이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에 선정됐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적인 가상 인플루언서는 로지다. 2020년 8월 등장한 로지는 서울에서 태어난 22세로 설정돼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약 17만 명이고 2021년 신한라이프 전속 모델로 발탁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아모레퍼시픽과 광고 계약을 체결했고 패션 잡지 ‘더블유코리아’ ‘보그’ ‘GQ’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2022년엔 드라마 ‘내과 박원장’에 카메오로 출연했고, 본인의 패션 브랜드 ‘오로지(OHROZY)’도 가지고 있다. 수익은 한 해 10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인플루언서를 꿈꾸며 등장한 버추얼 아티스트 아이돌도 있다. 인기를 얻는다면 차세대 가상 인플루언서로 등극하는 셈이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내놓은 나이비스가 그 주인공이다. 나이비스는 9월 10일 신곡 ‘DONE’으로 데뷔했다. 하이브도 AI 오디오 기술 자회사 수퍼톤에서 제작한 걸그룹 버추얼 아이돌 신디에잇을 지난 6월 데뷔시켰다. 엔터 업계에서는 이들 같은 버추얼 아티스트 아이돌이 음주 운전이나 마약 등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대중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지연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