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정책 금리를 인하했다. 당초 예상보다 큰 50bp(1bp=0.01%포인트) 인하였다. 시장은 큰 폭의 금리 인하가 경기 침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주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이미 미국 국채 금리는 금리 인하 가능성을 선반영해 지속 하락해 왔고, 국내 시장 금리 또한 가파른 하락세가 뒤따랐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미국 증시는 뜨거웠다. 미국이 ‘빅컷(big cut)’에 나서자, 한국은행 역시10월에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국고채 3년물 금리는 3%를 하회하고 있어 기준금리(3.5%) 인하 기대감을 반영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연준의 피벗(pivot·통화정책 기조 전환)을 반기는 분위기다. 금리 인하를 금융시장 내 유동성 증가로 받아들인 결과다. 하지만 동시에 의구심도 커진다. 파월은 경제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과거 연준의 금리 인하 국면 사례의 상당수는 경기 침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FOMC 뒤에 시장 참가자들은 ‘재조정(recalibra-tion)’이란 단어를 주시하고 있다. 50bp의 큰 폭 금리 인하가 피벗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사용한 낯선 단어였다. 과거 첫 금리 인하부터 50bp에 나설 경우 대개는 경기 침체의 예고편이었다. 파월은 기자회견에서 재조정이란 단어를 아홉 번이나 사용하며 시장의 우려를 잠재우려 했다.
과연 피벗이 아닌 재조정일 뿐일까. 당장의 주가 반응만 보면, ‘빅컷 금리 인하=경기 침체 임박’이란 시장의 우려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한다. 2021년 파월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했지만, 그의 발언 이후 인플레이션은 더 고착화됐다. 파월은 이번에도 미국 경제가 ‘괜찮다(basically fine)’고 했지만, 이 역시 오판일 수 있다. 오히려 빅컷의 근거로 제시한 고용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7월 고용 지표를 고려해 기준금리를 50bp 인하했다는 논리는 정책 실기(失期)의 다른 증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금리 인하 사이클 전환 임박한 한국
가계의 차입 비용과 기업의 조달 비용이 하락해 소비와 투자가 활성화되길 기대할 때 정책 금리 사이클이 시작된다. 최소한 경기하강이 불가피해 보일 때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금리가 높으면, 소비자는 지갑을 더 열기 힘들고, 투자자도 투자에 나서기 쉽지 않다. 금리를 낮춰 행동의 변화를 이끌고 싶지만, 의도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현재 5%인 미국의 기준금리가 연내 두 차례 인하된다고 가정해도 여전히 4%대 중·후반의 고금리 환경이 지속된다. 미 연준이 생각하는 장기적인 중립 금리 수준인 2.8%에 도달하는 시기는 2026년 이후다. 이는 결국 실물경제의 회복과 금융시장 내 유동성 개선 속도가 기대만큼 빠르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시선을 한국으로 좁혀 보면, 상황은 더 복잡하다. 한국 역시 주요국과 마찬가지로 금리 인하 사이클로의 전환이 임박한 상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내의 특수한 상황을 추가로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우선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수준(3.5%)이 미국과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따라서 빅컷과 같은 단기간 내 큰 폭의 금리 인하를 기대하기 어렵고, 금리 인하 속도 또한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실물 경기 회복과 유동성 증가 속도 또한 기대만큼 빠르지 못할 개연성이 크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최근 국내에서 가계 부채 이슈가 급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8월 금융통화위원회 당시 만장일치로 금리 동결이 결정된 배경은 물가 상승률 둔화와 비우호적 경기 여건에도 집값 상승과 가계 부채 증가에 따른 금융 안정성이 강조된 결과였다. 최근 국내 물가 상승률을 보면 4월 이후 이미 2%대로 진입했으며, 8월에는 2.0%로 한국은행의 정책 목표 수준까지 하락했다. 현 경기 상황을 대변하는 경기동행지수 역시 지속 하락하면서 금리 인하 명분은 이미 충족된 상태다. 그럼에도 최근 서울 및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가운데 은행권 가계 대출이 급증세를 보여 통화 당국이 적극적인 금리 인하에 나서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5~7월 중 은행권의 가계 주택 담보대출은 월평균 5조8000억원 증가했다. 이는 지난 2020~2021년 0%대 기준금리 상황에서 이른바 ‘영끌’과 ‘패닉 바잉’으로 대표되던 시기의 월평균 5조2000억원보다도 높은 수치다.
가계 대출 증가 폭이 심상치 않자, 금융 당국은 은행권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출 조이기에 나서고 있다. 처음에는 주택 담보대출에 적용하는 가산 금리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속도 조절을 유도했으나, 대출금리 인상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자, 직접적으로 대출 총량을 억제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성을 선회했다. 또한 정부는 8월 21일 하반기 가계 부채 관리 방안을 발표했다. 여기에 9월부터는 2단계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강화 조치도 시행됐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 조치로 단기적인 대출 억제 효과가 나타날 수는 있어도, 금리 인하 기대감이 지속되고 주택 가격 회복세가 완전히 꺾이지 않는 한 가계 대출 증가 압력이 쉽게 낮아지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정부와 금융 당국도 이런 점을 알기에 향후 필요시 DSR 적용 범위 확대 등 추가적인 규제 조치를 도입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가계 부채 억제 조치의 부작용 우려
주식 투자자를 포함한 금융시장 참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계 부채 이슈는 해묵은 논쟁이다. 한국의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빠르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규모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점은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다. 아직 가계 부채 이슈가 실제로 표면화된 사례가 없으며, 금융 안정성을 저해할 위험 요인이라는 점은 공감하지만,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부채가 동반 증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인식 또한 강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가계 부채 통제 기조 강화는 근본적으로 탄력적인 통화정책 운용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는 현 상황에서 가계 부채 부담이 국내 금리 인하에 걸림돌로 작용할 경우 금융시장, 특히 주식시장 참가자는 이를 정책적 불확실성 확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가계 부채 억제 조치의 또 다른 영향으로는 금리 인하에도 대출 공급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신용 여건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최근 가계 대출의 특징 중 하나는 20~30대 청년층의 대출이 많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상당 부분은 ‘영끌’과 ‘빚투’라는 명명하에 부동산, 주식 등 자산 시장으로 유입됐다. 문제는 청년층의 경우 상대적으로 재무 건전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이다. 또한 소비성향이 가장 높은 계층임에도 높아진 부채 부담으로 소비 여력이 제한될 수 있다. 이는 또다시 자영업자 혹은 내수 소비에 의존하는 기업의 재무 건전성에 악영향을 주는 파급효과를 갖는다. 안 그래도 부진한 내수 경기의 회복을 더욱 더디게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2024년 상반기 말 기준 한국의 가계 부채(가계 신용) 규모는 1896조원이다. 2022~ 2023년 중 가파른 금리 인상과 함께 가계 부문의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이 나타나면서 최근 2년간 가계 부채 증가율은 1.5%에 그쳤다. 역사적으로 볼 때 최근 가계 부채 증가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하반기 이후로는 금리 인하 사이클과 맞물려 가계 대출 증가 압력이 누적되고 있으며, 정부와 금융 당국 또한 본격적으로 규제 강도를 강화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가계 부채를 둘러싼 해묵은 이슈들이 재부상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주인공은 제조업이었고, 금융업은 조연에 불과했다. 증시도 글로벌 경제와 연동돼, 오르내리는 사이클을 이뤄왔다.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면서, 글로벌 분업화의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한국 제조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힘들어 보인다. 글로벌 증시 대비 한국 증시가 부진한 배경은 여기 있다. 제조업이 죽고, 금융업이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계 부채 관리마저 실패하면, 금융업까지 악화할 수 있다. 연준이 선제적 금리 인하에 나섰지만, 한국은행이 속도를 내 금리 인하에 나서기 힘든 이유다. 여전히 금융시장 및 금융권 관련 리스크에 대해 선제적인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