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스틸컷. /드림웍스 피처스
‘레볼루셔너리 로드’ 스틸컷. /드림웍스 피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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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같은 배우나 감독의 작품을 잇달아 다루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엔 규칙을 깨기로 했다. 잭이 살았다면 로즈와 함께 얼마나 행복했을까. 지난 회 소개한 영화 ‘타이타닉’을 본 관객은 안타까워했고, 그런 아쉬움을 늦게나마 풀어주려는 듯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11년 만에 함께 출연했다. 그러나 해피 엔딩을 바라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결혼 생활의 갈등과 균열을 차갑게 응시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모든 게 너무 달라서 사랑하게 되지만 바로 그 간극 때문에 못 살겠다고 비명을 지르며 파국으로 치닫는 이별 이야기는 의외로 흔하다. 현실적인 프랭크와 감성적인 에이프릴도 그런 커플 중 하나다. 성실한 청년 프랭크와 배우가 되고 싶어 하던 에이프릴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곧 결혼하고 집을 사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잘 살았다. 

적어도 남들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들여다본 집 안 구석구석, 권태라는 녹이 짙게 슬어가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다. 남편을 출근시킨 뒤 청소하고 빨래하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상의 반복,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하루하루는 그녀에게 아무런 보람도 주지 않았다.

대지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반짝이는 별을 따다 주겠다던 프랭크가 지상에 납작 엎드린 도마뱀처럼 더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것도 싫었다. 간간이 오르던 연극 무대가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배우의 재능이 없다는 건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의 애정 어린 위로와 격려조차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될 뿐이었다.

가정을 꾸리고도 꿈만 좇으려는 아내가 점점 버거워지기는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선녀 옷을 찾아 입고 하늘 높이 날고 싶어 하는 아내는 이제 남편의 얼굴을 봐도 웃지 않았다.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 집과 회사를 오가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프랭크였지만 어느새 가장의 책임에 짓눌린 채 지루한 날을 견디는 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생활의 의무, 자기만 치르는 것 같은 희생, 상대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다.

뜨겁던 사랑의 열기는 어디로 갔을까. 서로를 눈멀게 했던 찬란한 빛은 어쩌다 사라져 버렸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날의 어리석은 착시 현상이었을까. 시간의 누적은 아무리 막아보려 애써도 권태라는 무덤을 파고 만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처럼 철없는 10대의 이루지 못한 단기간의 열정만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스틸컷. /드림웍스 피처스
‘레볼루셔너리 로드’ 스틸컷. /드림웍스 피처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다. 감정이 격할 때 입에서 독하게 쏟아져 나오는 말은 분명 칼이지만, 그 퍼런 날에 베이는 건 시뻘겋게 피 흘리는 심장이다. 그래도 대개의 부부는 상처를 덮고 살아간다. 에이프릴도 돌파구를 찾는다.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낭만의 도시, 파리에 가서 살자고 남편을 설득한다. 그녀가 바란 건 꿈의 실현이 아니라 새로운 별에 다다를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정착했던 레볼루셔너리 로드, 굳이 해석하자면 혁명의 거리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의 마을엔 그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의 가면을 쓴 이웃이 살고 있었다. 변화란 악몽보다 두려운 것이다. 현재의 상태란 고통마저 익숙한 것이지만 변화는 미지의 세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길 바라면서도 어제와 똑같이 가면 뒤에 숨어서 고통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유다.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이웃이 꿈도 꾸지 못할 혁명을 일으켰다는 우월감에 잠시 도취된다.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일으키듯, 우쭐한 기분은 정체되어 있던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곧 사표를 던질 마음으로 프랭크가 부담 없이 올린 기획안이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 회사엔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하네.” 승진을 제안받은 프랭크는 갈등한다. 마침내 도전의 기회가 왔고 출세할 자신도 있는데 왜 낯선 세상으로 가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혁명의 향기에 취해 모처럼 화사한 날갯짓을 해 보이던 에이프릴도 변화를 맞이한다. 셋째 아이를 가진 것인데 그녀에게 임신은 새로운 출발을 방해하는 족쇄로만 느껴진다. 더구나 승진과 임신을 핑계로 파리행을 취소하자는 남편은 그녀에게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을 안겨준다. 에이프릴을 잠깐 환히 비추던 조명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등 돌리는 순간,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타인이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지만, 프랭크는 억지로 미소 짓는 아내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고, 에이프릴은 안정을 바라는 남편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혁명의 거리를 떠난다. 그들이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를 환영하던 이웃은 에이프릴 부부가 허황한 꿈을 꾸다 추락했다고 생각하며 속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누군가의 도전 실패와 그들의 불행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는 법이다.

무난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부부도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가정을 지키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좋은 척, 괜찮은 척, 화나지 않은 척, 불만과 분노를 감춘다. 싸울 일이 있어도 상대의 심장이 두 동강 나지 않을 만큼만 칼을 휘두른다. 세월에 단련된 남편은 아내의 말이 듣기 싫을 때면 보청기 스위치를 몰래 꺼버린다.

파리에 갔어도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바란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이성과 감성, 익숙해져 버린 관계의 늪에서 길을 잃었을 뿐. 그런데 결혼 생활만 그럴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이상과 현실, 그 간극을 좁히고 균형을 찾으려고, 시간에 마모되지 않으려고, 권태의 녹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혁명의 거리 언저리를 서성이며 낯선 세계, 새로운 인생, 불꽃 같은 일탈을 꿈꾸지 않는가. 

김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