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했다. 소설 ‘채식주의자’로 국내 최초로 맨부커상을 받았던 한강(54) 작가다. 맨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꼽히는 세계 3대 문학상이다. 아시아 여성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최초로, 국내에선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 노벨상 수상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월 10일(현지시각)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한림원은 “한강은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강은 수상 소식이 알려진 직후 노벨상위원회와 전화 인터뷰에서 “놀랐다”는 말을 수차례 되뇌었다. 한강은 “매우 놀랍고 정말 영광스럽다. (노벨상 측의) 지지에 정말 감사하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라며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자랐고, 한국문학과 함께 성장했다. 한국문학 독자와 동료 작가들에게 좋은 소식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강은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배 작가들의 노력’을 꼽았다. 그는 “내가 어릴 때 옛 작가들은 집단적인(collective) 존재였다. 그들은 인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결연했다. 그들의 모든 노력과 힘이 내 영감이다. 영감을 준 몇몇 작가를 고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한강을 막 알게 된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자기 작품으로는 ‘작별하지 않는다’와 ‘흰’ ‘채식주의자’를 꼽았다. 그는 “작가는 자기 최신 작품을 좋아한다. 나의 가장 최근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흰’은 매우 개인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꽤 자전적”이라고 말했다. ‘채식주의자’에 대해선 “그 작품을 3년간 썼고, 그 3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꽤 힘든 시간이었다” 고 회상했다.
한강은 누구… 시인으로 등단해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적 작가 반열
한강은 1970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서울 풍문여고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한강은 소설이 아닌 시로 먼저 등단했다. 1993년 대학 졸업 뒤 잡지 ‘샘터’에서 기자로 일하며 그해 계간 문예지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등 시 네 편을 실었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강은 이후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그대의 차가운 손’ ‘검은 사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외에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와 동화 ‘내 이름은 태양꽃’ ‘눈물상자’ 등을 펴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2016년 한국 작가 최초로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소설집 ‘채식주의자’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소설 세 편을 하나로 엮은 연작 소설집으로, 이 중 ‘몽고반점’은 2005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2004년 ‘창작과비평’에 처음 연재됐고, 국내에서는 2007년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2015년부터 영국을 시작으로 해외에 출간되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이 되어 죽어 가는 영혜와 그 주변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어느 날 육식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 영혜는 채식을 선언하지만, 가족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육식을 강요한다. 영혜에게 육식은 단순히 고기를 먹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를 둘러싼 세계의 폭력성을 의미한다. 영혜는 이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식물이 되어 죽기를 택하지만, 폭력성은 그를 끈질기게 옥죈다. 폭력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한강 특유의 문장으로 풀어내 국내외에서 찬사를 받았다.
이 밖에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로 제13회 동리문학상을, 2014년 ‘소년이 온다’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2015년에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한강의 가장 최근 작품은 2021년 작인 ‘작별하지 않는다’다. 제주 4·3 사태의 비극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한강은 이 소설로 지난해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상(외국문학 부문)을, 올해 3월엔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폭력’ 같은 인류의 보편적인 비극(채식주의자)부터 한국 현대사의 비극(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세상의 어둠과 상처를 다뤄 온 한강은 지난해 11월 기자 간담회에서 앞으로는 밝은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소설을) 두 편 작업했는데, 이제는 더는 안 하고 싶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눈이 계속 내리고 너무 춥다. 이제 봄으로 들어가고 싶다” 고 말했다.
한편 한강은 문인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는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추사’ ‘다산의 삶’ 등을 쓴 작가 한승원이다. 두 사람은 국내 최고 소설 문학상으로 꼽히는 이상문학상을 2대째 수상하는 기록도 세웠다. 한강의 오빠 한동림은 ‘유령’ 등을 펴내며 소설가로 활동했고, 남동생 한강인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린다. 한강의 남편은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다.
노벨상 뒤엔 발 벗고 나선 英 번역가 있었다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가 국내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건 2007년이지만, 9년이 지난 2016년 영국에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으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배경엔 젊은 영국인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가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스미스는 번역가로 진로를 정한 뒤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돼, 2010년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런던대 동양 아프리카대(SOAS)에서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거쳤다. 한국어를 배운 지 3년 만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만난 스미스는 작품에 반해 출판사 접촉부터 홍보까지 도맡았다. 스미스는 공로를 인정받아 번역가로서 맨부커상 수상을 함께하기도 했다. 스미스는 이후에도 한강의 ‘소년이 온다’ ‘흰’ 등을 번역했다. 이 밖에도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 ‘서울의 낮은 언덕들’과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등을 번역했다.
노벨상 소식에 베스트셀러 순위 점령
서점 사이트 먹통 되기도
10월 10일 오후 8시쯤(이하 한국시각) 한강의 노벨 문학상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책 주문도 쏟아지고 있다. 이날 저녁 교보문고, 예스24 등 국내 주요 서점 사이트에는 한때 접속자가 몰려 혼란이 빚어졌다. 이용자는 사이트 접속이 안 되거나 지연되는 등의 불편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예기치 못한 주문 폭주에 서점은 서둘러 재고 확보에 나섰고, 오프라인 서점에는 한강 작가 코너가 마련됐다.
한강이 선보인 작품들은 실시간 베스트셀러 순위를 장악했다. 10월 11일 오전 7시 기준, 교보문고 실시간 베스트셀러엔 ‘채식주의자’가 1위, ‘소년이 온다’ 가 2위, ‘작별하지 않는다’가 3위, ‘흰’이 4위, ‘희랍어 시간’이 5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가 6위, ‘채식주의자(개정판)’가 7위, ‘소년이 온다(전자책)’가 8위, ‘디 에센셜: 한강’이 9위에 올랐다. 예스24 역시 실시간 베스트셀러 1~20위 중 15개가 한강 작품이다. 밀려드는 주문에 개정판과 전자책을 제외하면 전부 예약 구매만 가능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