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한국계 미국인 감독 코고나다의 2017년 영화 ‘콜럼버스’는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인구 4만6000명의 이 도시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물들로 인해 현대 건축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몇 블록만 걸으면 마주치는 도서관, 은행, 소방서, 신문사, 교회 등이 모두 이오 밍 페이, 에로 사리넨, 로버트 벤투리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다. 콜럼버스에서 이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일부러 찾아가야 할 관광지가 아닌, 일상의 환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대 건축의 메카
콜럼버스가 ‘현대 건축의 성지’가 된 배경에는 지역의 디젤 엔진 제조 업체 ‘커민스’의 기부 사업이 있다. 건축의 사회적 영향을 중시했던 커민스의 대표 J. 어윈 밀러는 1950년대부터 콜럼버스에 새롭게 지어지는 공공건물의 설계비를 전액 지원하기 시작했다. 다만, 설계자는 커민스 재단이 엄선한 건축가 목록에서만 선택해야 했고, 이에 따라 현재까지 50개 이상의 현대적인 공공건물이 세워졌다. 영화는 유리, 철, 콘크리트 같은 현대적 재료와 기하학적 질서로 무장한 모더니즘 건축물이 현대인의 삶과 어떻게 교감하는지를 질문한다.
도시에 발이 묶인 인물들
영화의 주인공 케이시는 콜럼버스에서 임시직 사서로 일하며 건축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약물중독자였던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책임감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학 진학을 미룬 채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번역가로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 진이 등장한다. 진은 건축학자인 아버지가 강연을 위해 콜럼버스를 방문하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한국에서 날아왔다. 오랜 갈등으로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던 그는 아버지의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낯선 도시에 머무르게 된 것에 불만을 느낀다. 부모의 사정으로 콜럼버스에 발이 묶인 두 사람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가까워지며, 건축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영화는 낙관적인 케이시와 냉소적인 진이 도시의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내면의 감정과 갈등을 공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제3의 등장인물로서 모더니즘 건축물
영화 속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케이시와 진의 만남에 동참하는 제3의 등장인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밀 레이스 공원’의 언덕에서 두 사람이 아버지의 수첩에 관해 이야기할 때 화면 오른편에 우뚝 선 콘크리트 전망대는 고개를 돌려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건축물은 때때로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 두 사람의 관계에 깊이 개입하기도 한다. ‘노스 크리스천 교회’의 첨탑을 배경으로 설계자 에로 사리넨과 그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빛이 스며드는 육각형 내부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진의 아버지에 대한 내면적 이야기로 발전한다. 반복되는 벽과 기둥, 투명한 창으로 둘러싸인 건축 공간은 장면에 따라 화면상의 구도를 달리해 인물의 움직임과 여러 방식으로 중첩되면서 감정과 상황을 복합적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형식은 건축물이 긴밀하게 인물과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윈 콘퍼런스 센터: 건축물과 관계 맺는 방법
영화의 형식적 기법과는 달리, 현실에서 사람과 건축물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건축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전문적인 건축 지식이 아닌, 개인이 건축물과 맺는 감각적인 경험임을 강조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윈 콘퍼런스 센터’는 본래 에로 사리넨이 은행 용도로 설계한 건물로, 1954년에 완공되어 현재 국립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방형의 단층 구조에 통유리로 마감된 것이 특징이며, 지붕에 설치된 아홉 개의 돔이 열린 내부 공간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당시 이 건물은 매우 혁신적이었는데, 전통적인 은행 건물들이 대개 벽돌이나 석재로 지어진 위압적인 형태였고 은행원과 고객은 철창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로 사리넨은 화려하거나 억지로 감동을 주려 하지 않는 은행을 의도했으며, 이에 따라 마을 중심부에 유리로 둘러싸인 낮은 시장 같은 건물을 설계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진과 함께 어윈 콘퍼런스 센터를 방문한 케이시는 이 건축물이 자신이 콜럼버스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건축물이라고 소개한다. 진이 그 이유를 묻자, 케이시는 가이드처럼 건축물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나 진은 그녀의 설명을 가로막고, 건축물을 좋아하는 진정한 이유, 즉 이 건축물이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되묻는다. 잠시 생각에 잠긴 케이시는 건축물과의 진솔한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실내로 들어와 케이시를 비추고, 관객은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입 모양과 손동작을 볼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은 여러 개인의 경험과 기억의 축적을 통해 도시 속 건축물이 그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퍼스트 파이낸셜 은행: 모더니즘 건축에 깃든 영혼
2006년에 콜럼버스의 대형 상점가에 지어진 ‘퍼스트 파이낸셜 은행’은 케이시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녀가 건축을 좋아하고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데버라 버크가 설계한 이 은행 지점은 홀이 있는 벽돌 건물 위로 긴 유리 박스가 직각으로 얹혀 있는 독특한 형태다. 이 ‘공중에 떠 있는 유리 박스’는 하부 홀에 자연 채광을 유입시킬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는 드라이브 스루 고객을 위한 캐노피의 역할을 한다.
밤이 되면 이 건축물은 반투명한 유리 패널의 특성 덕분에 은은하게 빛을 머금으며, 도시의 등대처럼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 어머니의 약물중독이 시작되어 모든 것이 절망적이던 시절의 어느 밤, 케이시는 우연히 이곳으로 이끌린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며 한참 동안 건축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후로도 어머니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인생의 바닥과 같은 시간이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케이시는 이 건축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설계자가 드라이브 스루 은행이 도로를 지나는 차량에 쉽게 인지되도록 고안했던 빛의 박스는 인생의 길을 잃은 케이시에게는 교감과 위로의 대상이 됐다. 건축이 교감을 통해 개인의 치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쩌면 건축가만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대사처럼, 모더니즘 건축에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요소의 ‘부재’ 를 통해 항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특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