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술의 주재료는 쌀과 누룩, 물이다. 이 세 가지만 있어도 술을 빚을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우리 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주로 신경을 쓴 건 누룩이었다. 누룩 명인이라는 말은 있어도 쌀 명인이나 물 명인이라는 말은 없다. 술의 맛과 향을 좌우하는 건 누룩이라는 생각에 쌀이나 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많은 우리 술이 수입쌀이나 공공 비축미를 사용한다. 가격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2024년도 정부 관리 양곡 판매 가격을 보면 수입쌀(단립종)은 1㎏에 1423.5원이지만, 국산 쌀 중 햅쌀은 1㎏에 2679.7원이다. 수입쌀 가격이 거의 절반 수준이다. 가격이 저렴한 쌀을이용해 술을 빚다 보니 쌀을 통해 술맛을 차별화하는 시도도 없었다. 술을 빚는 용도로 생산하는 양조용 쌀 품종만 100여 개에 달하는 일본과는 차이가 크다.
하지만 우리 술에서도 다양한 맛과 향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변화가 생겼다. ‘설갱미’의 등장이 그 신호탄이었다. 설갱미는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에서 1991년부터 육성을 시작해 2001년 품종을 등록한 쌀이다. ‘탁·약주 개론’은 설갱미의 특징을 “멥쌀인데도 일반 쌀 품종과 달리 전체적으로 전분립이 조밀하게 채워져 있지 않아 쌀알이 심백과 같이 희고 불투명한 상태로 관찰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흡수 속도가 빠르고, 분쇄가 용이하다”라고 적고 있다.
눈처럼 하얀 설갱미로 만드는 우리 술
설갱미가 품종 등록된 건 2001년이지만, 설갱미를 이용한 술이 나온 건 그보다 뒤인 2007년의 일이다. 설갱미를 개발한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과 우리 술을 만드는 국순당 연구소가 힘을 모았다.
설갱미를 술 만드는 데 적합한 양조용 쌀로 개량하기 위한 추가 연구가 진행됐다. 설갱미 개발 과정에 직접 참여한 류수진 국순당연구소 부장은 “1992년 처음 백세주를 출시할 때는 찹쌀로 빚었고 약재 향이 강한, 굉장히 진한 맛을 냈다”라며 “하지만 우리 술에 대한 기호가 달라지고 소비자 입맛이 바뀌면서 지금은 가볍고 과실 향이 나는 맛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국순당연구소는 2002년 설갱미 종자 5㎏을 받아서 계약 재배에 나섰다. 매년 재배 규모를 늘리면서 수확한 설갱미에 대한 양조 적성 검사를 진행했다.
처음부터 백세주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지만, 설갱미의 특성이 백세주와 어울린다고 판단하고 백세주 담을 거쳐 백세주 전체로 설갱미를 확대했다. 류 부장은 “설갱미는 잘 부서지는 연질미여서 백세주를 만들 때 쓰는 생쌀 발효에 적합했고, 물 흡수도 좋았다”고 설명했다.
설갱미의 어떤 점이 우리 술에 어울렸을까. 설갱미의 특징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연구진과 국순당연구소 연구진이 함께 설갱미와 ‘추청’을 비교해 성분을 분석한 연구다. 추청미는 일반적으로 밥을 해 먹는 쌀로, 양조용 쌀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연구 결과를 보면 쌀의 성분 중에 술맛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 함량이 설갱미는 5.0%, 추청미 6.0%로 나왔다. 백설찰벼, 동진찰벼, 눈보라벼 등 다른 쌀에서는 단백질 함량이 7% 안팎으로 나오는 게 보통이다. 설갱미의 단백질 함량이 다른 품종보다 확연히 낮은 것이다. 류 부장은 “단백질의 고분자 펩타이드가 쓴맛을 만드는데, 실제로 술을 담그면 이 ‘1%포인트’의 차이가 술맛을 결정짓는다”며 “우리 술은 누룩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차피 단백질이 첨가된다는 지적도 있지만, 술의 재료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누룩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쌀의 단백질 함량이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성분도 설갱미가 양조용으로 보다 적합하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아밀로스는 밥쌀용 쌀에서는 함량이 높지 않은 게 좋지만, 술을 담글 때는 오히려 함량이 높아야 발효가 용이하고 알코올이 잘 생성된다. 설갱미의 아밀로스 함량은 19.8%로, 추청미(19.3%)보다 높다. 한국식품연구원 우리술연구센터가2010년 농림수산식품부의 의뢰를 받아 우리 쌀 20개 품종에 대한 막걸리 양조 적성을 조사한 결과도 같은 결론을 보여준다. 우리술연구센터는 20개 품종 가운데 ‘신동진’과 ‘주남’ 두 가지 품종이 막걸리 양조에 우수하다고 평가했는데, 모두 단백질 함량이 5%대로 낮았다. 연구진은 “양조미로 적합하려면 발효가 용이하고 알코올이 잘 생성되도록 아밀로스 함량이 높으면서도 잡맛 내지 산패(酸敗) 원인이 되는 단백질과 지방 비율이 낮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토종 쌀 막걸리 프로젝트… 제2의 설갱미를 찾아라
원래부터 우리 술이 쌀에 무심한 건 아니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쌀이 수천 가지 였다. 동네마다 저마다의 벼를 심고 키웠고, 집집이 만드는 가양주에 어울리는 쌀 품종을 선별했다. 일제강점기에 집필된 ‘조선도품종일람’에는 토종 쌀 1899가지가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 이후 쌀 품종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품종의 다양성이 사라졌다. 먹고살기 바쁜데 양조용 쌀을 따로 재배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사라진 우리 쌀이 수천 가지다. 경기도 양평군의 막걸리 양조장인 ‘C막걸리’와 토종 쌀 복원을 하고 있는 우보농장은 사라진 쌀 품종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우보농장은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토종 쌀 품종을 복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C막걸리는 우보농장이 복원한 토종 쌀을 이용해 막걸리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작년 말에 진행한 첫 번째 ‘토종 쌀 프로젝트’가 관심을 모았다. C막걸리는 우보농장이 복원한 토종 쌀 가운데 귀도, 한양조, 백팔미, 북흑조, 멧돼지찰 등 다섯 가지 품종을 이용해 막걸리를 만들었다. 최영은 C막걸리 대표는 “다섯 종류의 막걸리를 출시했지만, 쌀의 품종만 다르고 제조 방법과 부재료는 통일했다” 며 “쌀의 개성에 따라 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기 위한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섯 종류의 막걸리는 제조법과 레시피가 동일하지만, 확연히 다른 맛과 향을 보여줬다. 쌀의 차이가 우리 술의 맛과 향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최 대표는 “쌀이 달라지면 술이 달라진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시도가 그동안 없었다”며 “다음 단계는 쌀 품종마다 어울리는 레시피를 찾고, 매년 작황에 따라 달라지는 쌀의 특성에 맞는 블렌딩까지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국내에도 양조용 쌀 품종을 만들기 위한 연구와 노력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진 건 국순당의 설갱미 정도다. 국순당도 제2의 설갱미를 찾고 있지만 10년 넘게 뚜렷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류 부장은 “우리 술에 쌀을 쓰지 못했던 기간이 워낙 길었던 탓에 연구 결과가 많이 쌓여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술 전문가인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지방농업연구사는 우리 술에 맞는 양조용 쌀에 대한 기준을 먼저 확립하고, 그 이후에 양조용 쌀을 더 많은 농민이 재배할 수 있도록 행정적·제도적 지원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사는 “양조용 쌀을 농민이 심었을 때 일반 밥쌀용 쌀을 심었을 때보다 소득이 약간이라도 높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양조장과 농민이 계약 재배를 했을 때 정부에서 지원금을 준다거나 양조장에는 저리의 금액을 융자해 주는 식의 당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