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와인이 있다. 바로 펜폴즈(Penfolds)의 그레인지(Grange)라는 와인이다. 그레인지는 가격이 비싸 쉽게 접하기 어렵지만 와인 애호가라면 펜폴즈의 와인을 한 번쯤은 마셔 봤을 것이다. 펜폴즈가 스타일과 가격 면에서 워낙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특히 빈(Bin) 시리즈는 호주 프리미엄 와인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빈 뒤에 쓰인 숫자는 무슨 뜻일까. 그레인지의 탄생 비화와 빈 시리즈의 의미를 알면 펜폴즈 와인이 한층 더 맛있게 다가온다.
20세기를 빛낸 와인, 그레인지
펜폴즈는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44년에 의사 크리스토퍼 로손 펜폴드(Christo-pher Rawson Penfold)가 설립했다. 당시는 주정 강화 와인이 약으로 쓰이던 시절이라 펜폴드 박사도 환자 치료를 위해 포트나 셰리 같은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날로 성장하던 펜폴즈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South Australia) 와인의 3분의 1을 생산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그러던 중 펜폴즈에서 호주 와인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작은 1949년 수석 와인 메이커인 맥스 슈버트(Max Schubert)의 유럽 출장이었다.
펜폴즈는 더 나은 주정 강화 와인을 생산할 방안을 찾아오라며 슈버트를 스페인으로 출장 보냈다. 하지만 현지에서 와인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 슈버트는 행선지를 프랑스 보르도로 바꿨다. 보르도 와인의 뛰어난 품질에 감명받은 슈버트는 1951년 호주로 돌아와 시라즈(Shiraz)를 보르도 스타일로 양조한 레드 와인을 만들어 이사회에 선보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너무 무겁고 타닌이 강해 당시 소비자가 선호하던 가벼운 와인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당장 생산을 중단하라고 명했지만, 슈버트는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했고 그동안 슈버트가 만든 와인은 셀러 안에서 서서히 숙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 퇴사를 각오하고 이사회에 다시 내놓은 와인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오랜 숙성으로 발현된 풍성한 아로마가 복합 미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다. 그레인지는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됐고 그레인지 1955년산은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와인 12종 중 하나로 선정되며 호주 와인을 세계시장에 우뚝 세웠다.
그레인지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곳곳에 있는 펜폴즈의 포도밭에서 가장 좋은 시라즈만 골라 만든다. 체리, 라즈베리, 블랙베리, 자두 등 잘 익은 과일 향이 가득하고 초콜릿, 커피, 감초 같은 아로마가 풍미의 깊이를 더하며 벨벳처럼 포근한 질감과 묵직한 보디감이 입안 가득 희열을 선사한다. 영 빈티지일 때 마셔도 좋지만 30년 이상의 긴 숙성 잠재력을 자랑하므로 셀러에 보관했다 특별한 날에 연다면 찬란한 순간을 더욱 빛내 줄 것이다.
다양성과 품질의 상징, 빈 시리즈
그레인지의 탄생을 계기로 펜폴즈는 주정 강화보다 일반 와인 생산에 주력하며 빈 시리즈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빈 넘버가 붙으려면 펜폴즈가 정한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빈 숫자는 원래 와인 숙성실의 위치를 가리키는 번호였지만 지금은 와인의 이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빈 시리즈 중 첫 번째 와인은 1959년에 출시된 빈 28이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각지에서 수확한 우수한 시라즈로 만든 이 와인은 잘 익은 과일과 달콤한 초콜릿 향이 맛있는 조합을 이루고 있어 누구나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품질 대비 합리적인 가격도 큰 장점이다.
이듬해인 1960년에 출시된 빈 389는 시라즈의 풍성함과 카베르네 소비뇽의 강건함이 조화를 이룬 와인이다. 그레인지를 담았던 오크통에서 1년간 숙성을 거치기 때문에 ‘베이비 그레인지’라고도 불린다. RWT 빈 798는 빈 시리즈 중 가장 프리미엄급 시라즈다. RWT는 시라즈 와인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1990년대에 시행한 ‘Red Winemaking Trial’ 이라는 프로젝트의 약자다. 딸기, 라즈베리, 체리, 자두 등 다채로운 과일 향과 후추 같은 향신료 향이 매끈한 질감과 어울려 시라즈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으로는 빈 407과 빈 707이 주목할 만하다. 빈 407은 풍부한 과일 향, 산뜻한 산미, 탄탄한 구조감이 카베르네 소비뇽의 모범 답안 같은 품질을 자랑한다. 빈 707은 묵직한 보디감과 농축된 아로마에서 남다른 품질과 숙성 잠재력이 느껴진다. 보잉 707 비행기가 한참 인기를 끌 때 출시되면서 빈 707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와인은 포도 작황이 탁월한 해에만 생산되기 때문에 수집가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빈 시리즈 중에는 화이트 와인도 있다. 야타나(Yattarna)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빈 144는 무려 144번의 실험을 거쳤을 정도로 펜폴즈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샤르도네다. 그래서 호주 원주민 말로 ‘천천히’라는 뜻의 야타나가 붙었다고 한다. 농익은 과일, 신선한 허브, 은은한 버터 향이 매력적인 이 와인은 호주 최고의 샤르도네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빈 311은 야타나와 같은 밭에서 수확한 포도 중에 야타나에 쓰이지 않은 포도를 모아 만든 와인이다. 과일 향이 상큼하고 질감이 매끈해 가볍게 즐기기 좋고 연어처럼 기름진 생선이나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 등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빈 숫자에 8이 있으면 시라즈, 7은 카베르네 소비뇽, 1로 끝나면 화이트 와인이라고들 한다. 펜폴즈가 정한 규칙은 아니고 펜폴즈 애호가들이 발견한 공통점이다. 흠잡을 데 없는 빈 시리즈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숫자가 좀 헷갈린다는 것. 그런 면에서 8, 7, 1의 의미를 기억해 두면 맛있게 마신 와인을 기억하기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