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어 가면서 피기 시작한 산국. /홍광훈
가을이 무르익어 가면서 피기 시작한 산국. /홍광훈
홍광훈 문화평론가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국화를 언급한 고전 시가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도연명(陶淵明)의 다음 작품이다.

“초가를 엮어 사람들 사는 곳에 있어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 어찌 그럴 수 있는지 그대에게 묻노니, 마음이 멀면 땅은 저절로 외진 곳이 된다네.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서, 느긋이 남쪽 산을 바라본다. 산기운은 해가 지니 아름답고, 날 새들도 함께 돌아가누나. 이 속에 참뜻이 있을지니, 따져보려 하나 이미 말을 잊었노라(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20수로 된 연작시 ‘음주(飮酒)’의 제5수다. 그 제7수도 다음과 같이 국화를 읊고 있다.

“가을 국화에 아름다운 색깔 있어, 이슬 젖은 그 잎을 딴다. 이를 근심 잊는 술에 띄워, 세상 버린 이 내 속을 심원케 하노라. 한잔 술 비록 홀로 들이켜지만, 잔 다 비우니 단지가 저절로 기울어진다. 해 들어가자, 뭇짐승 움직임 그치고, 돌아가는 새는 숲을 향해 운다. 동쪽 처마 밑에서 마음껏 소리 질러 노래하나니, 그나마 이 삶을 다시 얻었도다(秋菊有佳色, 裛露掇其英. 泛此忘憂物, 遠我遺世情. 一觴雖獨盡, 杯盡壺自傾. 日入群動息, 歸鳥趨林鳴. 嘯傲東軒下, 聊復得此生).”

마음에 맞지 않는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면서 읊은 시가다. 국화에 얽힌 도연명의 다음 일화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한다. 어느 해의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집에 술이 없자 그는 집 가의 국화 덤불 속에서 국화를 한 움큼 따서 들고 그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흰옷 입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자세히 보니 친구 왕홍(王弘)이 술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대작하기 시작해 취한 다음 헤어졌다. 남북조시대 송(宋)의 사학자 단도란(檀道鸞)이 지은 ‘속진양추(續晉陽秋)’ 에 실려 있다.

이러한 도연명과의 인연으로 국화는 은사(隱士)의 상징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애련설(愛蓮說)’이란 짧은 문장에서 국화를 ‘꽃의 은일자(花之隱逸者)’라고 말했다. 그리고 국화에 대한 사랑은 도연명 이후로 별로 들은 바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도연명 이전에도 국화를 좋아한 문인이 적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시인 문객이 이를 즐겨 다루었다.

국화가 처음 등장하는 시가는 전국시대 말 초(楚)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다. 여기에 “아침에는 목련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朝飲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는 구절이 보인다.

위·진(魏晉) 시대에는 국화를 주제로 한 문장이 많이 나왔다. 위의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종요(鍾繇)에게 보낸 글에서 국화가 “천지의 순수함과 온화함을 머금으며, 향기롭고 맑은 기운을 지녔다(含乾坤之純和, 體芬芳之淑氣)”라고 탄복하면서 “몸을 돕고 목숨을 늘리는 것으로는 이보다 귀한 것이 없다(輔體延年, 莫斯之貴)”라고 극찬했다. 진의 부현(傅玄)은 ‘국부(菊賦)’에서 “이를 복용하는 자는 장수하고 먹는 자는 신선과 통한다(服之者長壽, 食之者通神)”라고 그 영험함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 성공수(成公綏)도 ‘국화송(菊花頌)’을 지어 “그 향기는 난초 꽃보다 나으며, 무성함은 소나무와 대나무보다 뛰어나다(芳踰蘭蕙, 茂過松竹)”면서 “그 꽃을 끊임없이 맛보면 신선 적송자(赤松子)나 왕자교(王子喬) 같은 복을 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예부터 국화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 이를 먹으면 장수하고 심지어 신선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믿어온 듯하다. 동진(東晉)의 왕가(王嘉)가 지은 지괴(志怪·괴이한 이야기를 적음) 소설집 ‘명산기(名山記)’에는 “도사 주유자(朱孺子)가 산에 들어가 국화를 복용한 끝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국화가 한창 피는 시기에 중양절이 있는 까닭으로 예부터 이 둘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남북조시대 양(梁)의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에 이와 관련된 전설이 실려 있다. 자기를 따라 여러 해 공부하던 환경(桓景)에게 비장방(費長房)이 “9월 9일 집에 재난이 닥칠 것이니 급히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집안 사람이 모두 산수유를 담은 붉은 주머니를 팔에 묶고,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면 화를 면할 수 있다” 고 했다. 그 말대로 실행한 환경이 저녁에 집에 돌아가 보니 모든 가축이 다 죽어 있었다. 이로부터 중양절에는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맹호연(孟浩然)이 어느 날 친구 집에 들렀다가 ‘과고인장(過故人莊)’이란 다음의 율시를 지어 중양절에 국화를 보겠다고 말했다. “벗이 닭고기와 기장밥을 갖추어, 나를 시골집으로 불렀다. 녹색 나무들은 마을 곁을 에워싸고, 푸른 산은 성 밖으로 비껴 있다. 창문 열어 마당과 텃밭을 바라보며, 술잔 쥐고 뽕과 삼 농사를 이야기한다. 중양 날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또 와서 국화와 마주하리라(故人具雞黍, 邀我至田家. 綠樹村邊合, 青山郭外斜. 開軒面場圃, 把酒話桑麻. 待到重陽日, 還來就菊花).” 이백(李白)은 9월 9일에 이어 이튿날에도 술을 마시면서 중양절을 두 번 지내는 셈이 되어 국화가 고생한다는 농담도 했다. ‘구월십일즉사(九月十日即事)’라는 시다. “어제 높은 곳 오르기를 마쳤는데, 오늘 아침 다시 술잔을 든다. 국화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렇게 두 번이나 중양절을 만났으니(昨日登高罷, 今朝更擧觴. 菊花何太苦, 遭此兩重陽).” 소식(蘇軾)은 “내일의 국화는 나비도 근심한다(明日黃花蝶也愁)”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9일 왕공의 운을 따라 짓다(九日次韻王鞏)’라는 칠언율시와 ‘남향자(南鄉子)’라는 사의 마지막 구절에 각각 쓰였다. 9월 9일에 봐야 제값을 하는 국화를 다음 날 보면 별 흥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화를 흔히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대표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소식의 칠언절구 ‘증유경문(贈劉景文)’에 “국화는 시들어도 여전히 서리에 버티는 가지가 있다(菊殘猶有傲霜枝)” 는 구절이 보인다. 이에 앞서 삼국시대 위(魏)의 종회(鍾會)가 ‘국화부(菊花賦)’를 지어 “가을 국화는 어찌 저리 신기한가? 엉긴 서리 속에서 홀로 화려하고 무성하니(何秋菊之奇兮, 獨華茂乎凝霜)”라고 상찬했다. 또 “서리를 무릅쓰고 꽃송이를 피우니 굳세고 곧음을 나타낸다(冒霜吐穎, 象勁直也)”라고도 칭송했다.

남송 초의 신기질(辛棄疾)은 ‘국화를 찾았으나 없어서 장난삼아 짓다(尋菊花無有戯作)’라는 부제가 붙은 ‘자고천(鷓鴣天)’ 곡조의 사에서 그러한 국화의 강직한 품격을 노래했다. “인간 세상의 냄새나고 썩은 곳에서 코를 막노라. 예부터 오로지 술만이 특별히 향기롭도다. 구름과 안개 가로 와서 산 뒤로는, 지금까지 줄곧 노래와 춤으로 바빴다네(掩鼻人間臭腐場. 古來惟有酒偏香. 自從來住雲煙畔, 直到而今歌舞忙). 늙은 짝 불러 함께 가을 풍광 즐기노라니. 국화는 어디서 중양절을 피해 있나? 흐드러지게 필 때가 언젠지 알아야 할지니, 서쪽 바람 불고 밤새 서리 내리기만 기다린다네(呼老伴, 共秋光. 黃花何處避重陽. 要知爛熳開時節, 直待西風一夜霜).” 뜻대로 되지 않던 벼슬살이에서 분연히 물러난 뒤에도 변함없는 자신의 굳센 의지를 국화에 빗대어 펼쳐내고 있다.

남송 말에서 원나라에 걸쳐 살았던 시인 화가 정사초(鄭思肖·1241~1318)는 ‘한국(寒菊)’이란 절구로 추위에 굽히지 않는 국화의 절개를 이렇게 표현했다. “꽃이 피어도 모든 꽃의 무리와 함께하지 않고, 성긴 울타리에 홀로 서 그 정취 끝이 없도다. 차라리 가지 위에서 향기 안고 죽을지언정, 어찌 북쪽 바람 속에 불려서 떨어지겠나(花開不并百花叢, 獨立疏籬趣未窮. 寧可枝頭抱香死, 何曾吹落北風中)?” 이 역시 국화의 오상고절을 빌려 북방 이민족의 왕조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연한 결의를 표현한 것이다.

백일홍이 마지막 남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는 마당 여기저기서 산국(山菊)이 피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집 주위의 야산에서 보이는 대로 캐서 심은 것이 이제는 너무 많이 번식해 오히려 잡초처럼 돼 버렸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지나치면 역시 문제다. 새삼스럽게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을 배운다. 

홍광훈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