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미국이 혁신을 주도하고 유럽은 뒤늦게 규제를 만든다고 여겨지나, 블록체인 분야에서는 유럽이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확한 유럽의 규제 환경은 혁신을 억누르기보다는 촉진했다. 유럽은 핀테크와 스테이블코인 같은 분야에서 금융 혁신의 선두 주자로 부상하고 있다.”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금융시장혁신국 국장 - 독일 비아드리나 유럽대 문화학·철학 박사, 현 유럽블록체인협회 공동의장, 전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 부국장, 전 글로벌매틱스 법률 고문.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 국장이 최근 서울 강남구 해시드오픈리서치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김태호 기자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금융시장혁신국 국장 - 독일 비아드리나 유럽대 문화학·철학 박사, 현 유럽블록체인협회 공동의장, 전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 부국장, 전 글로벌매틱스 법률 고문.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 국장이 최근 서울 강남구 해시드오픈리서치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김태호 기자

‘알프스의 강소국’ 리히텐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상 자산과 블록체인 기술을 제도권으로 받아들인 국가다. 2020년 1월, 리히텐슈타인의 가상 자산 기본법인 ‘가상 자산과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자 법(TVTG·가상자산법)’이 시행됐다. TVTG는 ‘블록체인법’이라고도 불리며 가상 자산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법률로 평가받는다. TVTG의 목적은 가상자산 이용자를 보호하고 가상 자산 거래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 법은 블록체인 활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다. 가상 자산 사업자는 리히텐슈타인 금융 당국의 감독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가상 자산에 대한 개념 정의를 법령으로 명시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가상 자산 발행을 명확하게 규율한다. TVTG는 글로벌 가상 자산 규제의 교본으로 자리 잡아 유럽연합(EU)의 가상 자산 규제인 미카와 아랍에미리트(UAE) 및 카타르의 가상 자산 관련 제도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의 가상자산법 제정을 주도한 곳은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직속 부서 금융시장혁신국이다. 리히텐슈타인 정부는 2016년부터 규제 설립을 위해 업계와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2019년에 이 법을 만들었다. 금융시장혁신국을 총괄하는 클라라 게라(Clara Guerra) 국장은 최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세계 최초로 만든 가상자산법은 리히텐슈타인 내 가상 자산 산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며 “이 법 덕에 리히텐슈타인은 디지털 금융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리히텐슈타인은 빠르게 가상 자산 산업 발전을 이뤄냈다. 리히텐슈타인 내 등록된 가상 자산 사업자 수는 27개로 한국에서 영업 중인 가상 자산 사업자 수(22개)보다 많다. 리히텐슈타인 기업이 개발한 블록체인 멀티버스엑스의 경우, 총예치 자산(TVL)이 1억1300만달러(약 1545억원)에 달한다. 

한국의 대표 블록체인이라 불리는 위믹스의 TVL은 1100만달러(약 150억원)에 그친다. TVL은 블록체인 내 예치된 이용자의 자산 규모로 블록체인의 유동성과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다음은 게라 국장과 일문일답. 

금융 혁신 추진에 있어 규제 기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규제 시기와 접근 방식이 중요하다. 너무 일찍 규제를 도입하면 초기 기술 발전을 억압할 수 있다. 반면에 너무 늦게 규제를 적용하면 소비자와 산업 전체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규제가 혁신을 저해한다는 통념이 있다. 나는 적절한 규제가 혁신을 촉진한다고 믿는다. 신중하게 설계된 규제는 법적인 명확함을 제공하고, 이는 소비자의 신뢰와 기업의 확신을 뒷받침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러한 요소는 지속 가능한 성장에 필수적이다.”

방한 기간 중 한국 금융위원회 가상자산과와 미팅을 한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 이번 면담은 변화하는 가상 자산 환경에 대해 공유하고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블록체인은 본질적으로 국경이 없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각 관할권의 규제 당국과 금융시장 관계자가 지속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고, 귀중한 통찰을 공유할 수 있다. 앞으로 리히텐슈타인과 한국은 협력을 강화하고 두 국가가 더 긴밀하게 손잡을 수 있는 분야를 모색할 계획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잠언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를 인용해 블록체인 기술의 효용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블록체인 같은 새로운 언어나 도구는 금융 서비스의 지평을 넓히고 이용자 혜택을 증대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기술은 서비스의 다양성을 촉진하고, 이용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과 통제권을 제공한다. 특히 블록체인은 기존 금융시장 구조에 투명성과 효율성 등 특정 측면을 개선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인용한 이유는 이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명확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을 발전시킬 때 공통의 개념과 명확한 용어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을 온전히 이해하고 이용자의 의도와 효과적으로 일치시킬 수 있다.”

일각에선 핀테크 및 블록체인 산업 발전을 미국이 주도한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최근 유럽에서 핀테크와 블록체인 분야의 중요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주요 기업과 신규 가상 자산 발행사가 유럽에서 설립됐다. 물론 많은 기업가와 자본이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내 규제 불확실성은 새로운 산업 발전의 발목을 붙잡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이 혁신을 주도하고 유럽은 뒤늦게 규제를 만든다고 여겨지나, 블록체인 분야에서는 유럽이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확한 유럽의 규제 환경은 혁신을 억누르기보다는 촉진했다. 유럽은 핀테크와 스테이블코인 같은 분야에서 금융 혁신의 선두 주자로 부상하고 있다.”

1971년 ’닉슨 쇼크’ 이전 사람들은 미 달러의 금본위제를 당연히 여겼다. 지금 사람들은 현금 기반의 물리적 금융거래에 더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 가상 자산의 유용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다.

“오랜 시간 자리 잡은 기존 관행에 도전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사람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블록체인과 가상 자산은 과거의 혁신 기술과 마찬가지로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대중의 폭넓은 채택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블록체인은 주로 백오피스 기술로 사용되고 있어 일반 대중이 직접적으로 접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울러 일반인은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전문가일 필요가 없다. 인터넷의 작동 방식을 정확히 몰라도 매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터넷은 1960년대 소수 연구자에 의해 발명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터넷은 더 빠르고, 다용도화되며, 접근성이 좋아졌다. 인터넷이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된 지 불과 20여 년이 지나 인터넷은 우리의 일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됐다. 마찬가지로, 화폐의 역사를 살펴보면 물물교환에서부터 조개나 금속 동전, 종이 화폐, 20세기 후반의 전자거래까지 끊임없는 변혁이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각각 회의론을 수반했다. 사람들이 적응하고 신뢰를 쌓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가상 자산의 시대로 접어들며, 우리는 비슷한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가상 자산은 전통적인 시스템보다 더 효율적이고 투명한 화폐와 가치 전송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주요 변화가 그러하듯, 가상 자산도 시간이 필요하다. 가상 자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기술이 성숙해지면 이용이 더 편리해져 신뢰 또한 쌓일 것이다.”

금융시장혁신국의 운영 목표가 궁금하다.

 “금융시장혁신국은 가상 자산과 블록체인의 지평이 확장되도록 업계와 계속해 소통할 것이다. 단순히 발전된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화된 경제가 일상에 스며들 수 있도록 블록체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김태호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