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전 대통령과 그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J.D. 밴스 상원의원. /사진 AFP연합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전 대통령과 그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J.D. 밴스 상원의원. /사진 AFP연합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1812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러시아 침공에 실패한 해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악장 중간에 축포를 울리는 ‘1812년 서곡’을 작곡했고, 레프 톨스토이는 운명의 순종자가 운명의 지배자에게 저항하는 이야기를 담은 ‘전쟁과 평화’ 라는 걸작을 남겼다. 

1812년은 나폴레옹전쟁(1799~1815년)이 초래한 프랑스와 영국의 경제적, 군사적 갈등이 북미 대륙의 특수성과 결합하여 ‘1812년 전쟁’이 벌어진 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흙수저 민주주의’로 일컬어지는 ‘잭슨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미국의 서부 확장이 본격화했고 ‘화폐와 은행’을 둘러싼 정치 투쟁이 격화했다. 무엇보다도 ‘1812년 전쟁’은 강대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떻게 군사적 갈등과 뒤섞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치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프랑스 전쟁에 진퇴양난 빠진 美

미국은 건국 초기 프랑스, 스페인과 무역을 통해 번영했다. 미국은 ‘자유로운 선박이 자유로운 상품을 만든다’며 중립국의 특권을 주장했지만, 프랑스와 전쟁 중인 영국은 ‘평시에 허용되지 않는 무역은 전시에도 허용되지 않는다’며 이를 무시했다. 1794년 영국은 미국의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제이조약(Jay Treaty)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미국은 허울뿐인 ‘영국에 대한 무역 특권’을 얻었고, 영국은 북미의 프랑스 식민지인 미시시피강 연안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인은 미시시피강을 자신의 내수로 여겼기 때문에 크게 반발했다. 이것은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4대 대통령)이 이끄는 친프랑스 성향의 공화파(현 민주당)가 조지 워싱턴(1대 대통령), 존 애덤스(2대대통령)가 이끄는 친영국 성향의 연방파(현 공화당)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계기가 됐다.

1801년 친프랑스 성향의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후 영국은 미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805년 영국이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승리하고 프랑스 항구를 봉쇄하자,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 항구를 방문하는 모든 선박을 적선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의 베를린칙령을 선포했다. 1807년 영국은 ‘중립국 선박이 프랑스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영국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의 수색에 복종한 중립국 선박을 나포한다’는 내용의 밀라노칙령을 발표했다. 이제 미국 선박은 영국의 명령에 따르면 프랑스에 나포되고, 프랑스의 명령에 따르면 영국 해군의 먹이가 될 운명에 처했다. 

1807년 제퍼슨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 양측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미국 항구를 통한 모든 수출입을 금지하는 금수법(Embargo Act)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금수법은 미국에 더 큰 피해를 줬다. 1809년 미 의회는 영국과 프랑스와 무역만을 금지하는 통상금지법(Non-Intercourse Act)으로 대체했다. 이것 또한 자해 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영국이 미국의 중립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폴레옹전쟁이 명분이었지만 실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영국의 제조 업자, 운송 업자가 자신의 경쟁자인 ‘양키(미국)’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영국 해군을 사용해야 한다고 영국 의회를 압박했던 것이다.

美 연방파 몰락으로 이어진 인디언 전쟁

미국 북서부에서는 급속히 확장하는 미국에 대한 인디언의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쇼니 인디언의 지도자 테쿰세는 미국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오대호 연안에서 인디언 연합(Indian Confederation)을 결성했다. 전쟁이 임박하자 영국은 빈약한 정규군을 보강하기 위해 인디언 연합을 끌어들였다. 변경 지대에서 약탈, 방화가 이어지자, 미국인은 영국이 캐나다에서 철수하면 인디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고, 캐나다인(영국인)은 미국 팽창주의자가 인디언 불안을 정복 전쟁에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1812년 미국은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지만, 이 시기 미 의회는 심각하게 분열돼 있었다. 상공업이 발달한 북동부 뉴잉글랜드인은 전쟁에 반대했고, 넓은 농지를 기반으로 한 서부와 남부인은 전쟁을 지지했다.

1812년 영국에서 퍼시벌 총리가 암살되자 리버풀 경이 이끄는 온건파 내각이 들어섰다.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농장주들이 미국 무역 금지에 대해 불평하고, 영국의 경기 침체가 심화하자 리버풀 내각은 미국에 대한 무역 제재를 완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지는 데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유럽의 갈등에 몰두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적대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캐나다의 영국군은 전쟁 내내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초기 미국인은 연전연패를 기록했다. 미시간 준주(Michigan Territory) 주지사 윌리엄 헐은 미군을 이끌고 캐나다로 진군했지만, 영국·인디언 연합군에 밀려났고, 디트로이트를 총 한 발 쏘지 않고 내주었다.

전쟁 중기 이후 앤드루 잭슨, 제이콘 브라운 등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미국은 영국에 빼앗겼던 지역을 회복했다. 1813년 미군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했고, 인디언 지도자 테쿰세가 사망하면서 인디언 연합이 붕괴됐다. 하지만 남동부에서는 토착민인 크릭 인디언과 미군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발발했다. 1814년 앤드루 잭슨은 앨라배마에서 크릭 인디언 주력 부대를 격파하면서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1814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면서 대규모의 영국군이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영국군은 워싱턴을 점령하고 의사당과 정부 청사를 불태웠다. 하지만 볼티모어 공격이 좌절되고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영국군은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부 체서피크 대신 남부 뉴올리언스 공세를 계획했다. 전황이 불투명해지자 연방파(현 공화당)는 코네티컷 하트퍼드에 모여 휴전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인은 뉴잉글랜드와 연방파의 충성심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종전 이후 연방파는 매국노로 몰려 몰락하게 된다.

잭슨 민주주의와 힐빌리의 노래

러시아 차르(황제)가 중재를 제안했다.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영국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볼티모어 전선이 고착되자 평화 회담에 나섰다. 1814년 12월 말 벨기에 헨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영국은 미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대호 연안에 인디언 장벽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전쟁의 승리로 식민지를 많이 얻었기 때문에 사업성이 불투명한 미국 길들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1815년 1월 초 조약 체결을 알지 못한 영국군이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를 공격했지만 앤드루 잭슨의 민병대에 괴멸당한다. 이후 전쟁 영웅 앤드루 잭슨은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흙수저 민주주의인 ‘잭슨 민주주의’를 태동시킨다. 잭슨 민주주의는 최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J. D. 밴스 동맹을 탄생시켰다. 부통령 후보인 밴스는 기초생계비로 연명하던 백인 빈민층 출신으로 해병대 복무 후 오하이오 주립대를 거쳐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성공한 변호사로서, 세계적 베스트 셀러 ‘힐빌리(백인 빈민)의 노래’ 의 저자이기도 하다.

전쟁 후 애국심의 급증은 미국인에게 국가적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북서부에서 인디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영토 확장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남부에서는 잭슨이 크릭 전쟁에서 승리했고 1821년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미국에 양도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