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법은 1950년 4월 21일 국회에서 통과돼, 5월 5일 공포된 이후 경제·사회·정치 환경 변화에 따라 총 11차례에 걸쳐 개정됐다. 1950년 한국은행법이 제정된 과정이 역사적으로 중요할뿐더러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기에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기본 이념에 충실했던 한국은행법
한국 정부는 금융기관 재편성과 중앙은행법 기초 작업에 있어서 외국의 기술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1949년 6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사회 의장에게 전문가 파견을 의뢰했다. 이에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아서 블룸필드(Arthur I. Bloom-field) 박사와 존 젠센(John P. Jensen)이 1949년 9월 초 서울에 도착해 6개월간 한국은행제도의 구조와 정책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조사를 마친 후 1950년 2월 한국 정부에 ‘한국중앙은행 개편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는데, 원문은 국내에 남아있지 않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한 것을 국립중앙도서관이 제공하고 있다.
두 연구자는 건의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45년 9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더욱이 그 3년 후 대한민국이 수립한 이래 은행가, 정부 관리는 물론이요 널리 일반 대중 사이에 한국의 금융기관 재편성과 국가의 요청에 부합되는 신은행법 제정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에 진주하고 있는 동안 수행한 허다한 중요한 금융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은행은 이미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일본 법령과 기타 규칙하에서 아직도 운용되고 있으며 또한 한국의 금융 체계가 일본의 일환이었던 해방 전에 취득한 불확실한 자산과 부채를 지금도 장부에 보유하고 있다.”
두 연구자가 법 초안을 작성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당시 한국 경제가 심각한 물가·임금의 나선적 가격 상승에 빠져있다는 점이었다. 두 연구자는 조속한 시일에 인플레이션을 제압하지 못하면 금융· 통화 시스템이 붕괴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소매물가지수는 12.4, 도매물가지수는 11.2, 임금지수는 18.4였으나 4년 후인 1949년 9월 각각 206.3, 254.7, 312로 약 20배 정도 상승했다.
1950년 제정된 한국은행법 제3조에서 한국은행의 주요 목적은 첫 번째가 ‘국민 경제 발전을 위한 통화가치의 안정’, 두 번째가 ‘은행, 신용 제도의 건전화와 그 기능 향상에 의한 경제 발전과 국가 자원의 유효한 이용의 도모’, 세 번째가 ‘정상적인 국제무역, 외환 거래 달성을 위한 국가의 대외 결제 준비 자금의 관리’다. 제정 당시 한국은행법은 건전 통화 유지, 금융의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중앙은행제도의 기본 이념에 충실했다. 또한 중앙은행으로서 통화 신용 정책, 외환 정책 수립과 집행, 금융기관의 감독 등 다양한 기능과 권한을 부여받았다. 74년이 지난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해도 선진적이고 완결성 높은 법이다.
11차례 개정으로 성격 변화
그 이후 한국은행법은 11차례의 개정을 거치게 된다. 그 개정 중에서 한국은행의 기본 성격 변화를 초래한 개정으로 1962년 5월에 이뤄진 제1차 개정과 1997년 12월에 이뤄진 제6차 개정, 2011년 9월에 이뤄진 제8차 개정이 꼽힌다.
1950년대 말 전후 복구가 완료되고, 인플레이션이 안정됨에 따라 정부 역할을 강화하자는 방향으로 개정 논의가 전개됐으나 한국은행법을 경솔하게 개정한다는 비판 때문에 이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을 금융 시스템에서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금융기관을 통제하고, 경제개발을 위한 통화 신용 정책을 펼치기 위해 한국은행법을 1962년 개정해 제정법에 반영돼 있던 금융의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됐다. 일례로 기존 통화, 신용 및 외환에 관한 정책 수립에서 통화, 신용의 운영 관리에 관한 정책으로 기능이 축소되고 외환 정책에 관한 주요 권한이 삭제돼 재무부로 이관됐다. 또한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정책 결정 사항에 대한 재무부 장관의 재의요구권을 신설하고 금융정책에 관한 최종 결정권을 정부에 귀속시켰다. 다만 한국은행의 은행감독부를 은행감독원으로 승격하고 권한을 강화했다.
제6차 개정은 1990년대 사회의 민주화 흐름 속에서 경제학자들의 중앙은행의 독립성 촉구 운동에서 시작됐다. 1997년 12월 통과된 제6차 개정안은 통화 신용 정책 운용에 관한 자율성을 높이고 물가 안정 목표제를 제도화하는 동시에 한국은행의 은행 감독에 관한 대부분 기능은 삭제하고 이 권한을 신설될 금융감독위원회로 이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의 목적을 종전의 통화가치 안정과 은행 신용 제도의 건전화에서 물가 안정으로 변경했다. 또한 한국은행의 자주성, 공공성 및 투명성에 관한 규정이 신설됐다. 은행, 증권, 보험 등에 대한 감독 기능을 통합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금융 감독 체계가 개편됨에 따라 은행감독원 관련 규정이 삭제되고 한국은행에는 통화 신용 정책과 관련된 제한적인 감독 기능만을 부여했다.
제8차 개정은 글로벌 금융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종전의 중앙은행제도로는 효율적인 위기 대응이 어렵다는 인식에 따라 2011년 9월 한국은행의 금융 안정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법 제1조 목적 조항에 “한국은행은 통화 신용 정책을 수행할 때 금융 안정에 유의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이를 위해 자료 제출 요구 대상에 포함되는 금융기관을 종전의 은행에서 제2 금융권까지 확대했는데, 글로벌 금융 위기가 제2 금융권이라 불리는 비은행 금융기관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10월 11일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연 3.50%에서 3.25%로 인하했다. 이는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한 2021년 8월 이후 3년 2개월 만의 인하다. 인플레이션이 안정적 상황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향후 금리 인하 속도는 가계 부채를 포함한 금융 안정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트럼프 트레이드로 미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달러 가격이 치솟고 있으니, 한국은행의 금융 안정 임무는 더욱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