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창업자가 크게 늘고 있다. 2017년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 기업이 센드버드, 몰로코, 블라인드, 미미박스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실리콘밸리에만 100개 이상, 미국 전역에는 어림잡아 2000개가 넘는 듯하다. 한국인 창업자 연합(UKF·United Korean Founders)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1월과 10월 각각 뉴욕과 실리콘밸리에서 열리는 모임이 있는데, 500~1000명의 예비 창업자와 창업자가 딱히 홍보를 하지 않아도 모인다. 바야흐로 한국인 창업자의 미국 개척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에 한국인 창업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인공지능(AI) 발전이 너무 빠르고, 대부분의 변화가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제품의 국가 및 언어 장벽도 무의미해져 젊은 창업자는 본능적으로 ‘변화의 중심인 실리콘밸리에 가서 창업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한국의 창업 환경, 특히 규제 환경과 탄탄한 빅테크(대형 정보 기술 기업)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인허가를 받지 않은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기 어렵고,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맞춰 제도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또 카카오, 네이버, 쿠팡 등 모바일, 검색, 이커머스 시장에 거대한 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국내시장에 수십 개의 계열사를 내는 구조로 성장했기 때문에 내수 시장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큰 파이가 남아있지 않다. 마지막 이유는 그럼에도 창업자와 투자자의 꿈이 계속 커지기 때문이다.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가 아닌 홍익대를 자퇴하고 뉴욕에 와서 10여 년에 걸쳐 기업 가치 약 6조원의 기업을 일군 헬스케어 분야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 ‘NOOM’의 정세주 대표를 비롯해 실리콘밸리의 몰로코, 센드버드 등의 창업자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돼 젊은 창업자의 미국행을 이끌고 있다.
이스라엘처럼 시작부터 글로벌 창업을 꿈꾸는 젊은 창업자가 많아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흐름에서 한국과 한국 자본시장이 이득을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이민자 기업은 본국에서 똑똑한 인재를 많이 채용하는데, 한국에선 외국인 지식 노동자를 채용하는 것뿐 아니라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임직원을 채용·해고하는 게 매우 어렵다. 또한 한국의 벤처 투자 펀드는 만기가 8년이다. 보통 10~12년인 미국 벤처캐피털(VC)에 비해 운용 기간이 짧다. 한국 VC로부터 투자받아도 미국 창업자 비자 취득 등의 이점이 딱히 없다. 매년 세계 최고의 벤처 투자자 리스트를 발표하는 ‘포브스 미다스’ 리스트를 보면 최근 쿠팡에 투자한 많은 투자자의 이름을 볼 수 있지만, 그중 한국인은 없다. 왜 우리 자본은 한국 시장에서 수십조원의 기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함께 이득을 볼 수 없었던 걸까.
미국 내 한국인 네트워크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이건 한국만의 흐름이 아닌 전 세계적인 트렌드다. 일본, 대만, 인도 등 AI 시대에 발맞춰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인재가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먼저 정착한 이와 새로운 이가 서로 밀고 당겨주며 미국에서 정착과 성장을 도와주고 있다. 한국인이 만든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미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문화권 사람에게 연락해 제품을 소개하고 피드백을 얻어 판매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한국 밖에서도 먼저 믿어줄 사람은 같은 한국인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제품은 서로가 서로의 고객인 경우가 많아 한국인끼리 뭉치고자 하는 니즈가 강해지는 분위기다. 한국인 네트워크의 양과 질이 발전하면서 ‘해외에 나가면 한국인을 조심하라’는 말은, 특히 스타트업 시장에선 옛말이 됐다.
K팝, K컬처의 성장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평판이 매우 높아졌지만, 안타깝게도 글로벌 자본시장에서의 한국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미국 VC는 한국의 경제성장률과 출산율 등에 대해 외우다시피 하며 쿠팡을 알지만, ‘넥스트 쿠팡’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다행인 것은 미국의 많은 한국인 창업자 중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처럼 모국을위해 도전하고자 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고 자란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창업자와 국가, 자본시장이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도록 인프라와 관점의 빠른 변화가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