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2024년 9월 9일 나온 한 보고서가 유럽 경제계를 흔들었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경제학자 마리오 드라기가 쓴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1년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드라기에게 “EU의 경쟁력을 유지할 해법을 담아달라”고 요청해 나온 것이다. 보고서가 나오자, 유럽은 물론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주요국이 주목했다. 영국 BBC는 이 보고서에 대해 “드라기는 EU의 존재론적 문제를 던졌다”라고 했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드라기 보고서는 유럽을 스스로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라고 했다. 드라기 보고서가 뜨거운 반응을 얻은 건 그가 지적한 유럽의 상황과 대안의 수위가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가령 드라기는 보고서에서 “EU가 미국, 중국과 △에너지 △클린테크 △디지털화, 첨단 기술 △국방·안보 등 10개 주요 경제 부문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간 8000억유로(약 1189조원)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는 EU 국내총생산(GDP)의 4.5%에 해당하는 규모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에 대한 미국의 원조보다 두 배가 많다. 현재 EU의 상황을 제2차 세계대전보다 심각하게 본 셈이다. 필자는 드라기 보고서를 소개하면서 ‘유럽을 깨우는 모닝콜’이라고 평가했다. 드라기 보고서에 나온 EU에 대한 평가와 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을 긍정적으로 봤다. 그러면서 유럽 경제계와 EU 각국 지도자가 드라기의 제안을 실행할 준비가 돼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EU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결 방법이 나왔지만, 정작 EU 국가들이 실행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이 보고서는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로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럽은 현재 현상 유지와 더 깊은 통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였다. /사진 셔터스톡
유럽은 현재 현상 유지와 더 깊은 통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였다. /사진 셔터스톡
배리 아이켄그린 UC 버클리 경제학 교수 - 예일대 경제학 박사, 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 IMF 수석 정책자문위원, 전 한국은행 자문위원 /사진 프로젝트신디케이트
배리 아이켄그린 UC 버클리 경제학 교수 - 예일대 경제학 박사, 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 IMF 수석 정책자문위원, 전 한국은행 자문위원 /사진 프로젝트신디케이트

유럽의 현재 경제 상황을 담은 드라기의 보고서는 유럽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우리는 드라기의 경고가 수용될지 혹은 유럽 정책 입안자가 판단을 유예할지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드라기 보고서는 유럽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 가지 분야를 지적한다. 가장 취약한 분야는 첨단 기술을 포함한 혁신 분야다. EU의 혁신 분야는 미국과 중국에 비해 뒤처져 있다. 특히 첨단 기술 분야가 가장 취약하다. 높은 에너지 가격과 방위산업의 낮은 경쟁력도 문제다. 이런 문제가 유럽의 경쟁력과 안보를 악화하고 있다. 

드라기는 EU가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사회 전반에 더 깊은 통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벤처캐피털 산업을 육성할 수 있도록 자본시장동맹(CMU)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새로운 기업이 규모를 확장할 수 있도록 규제 장벽을 낮추고, EU 간 통합 전력망을 구축해 탈탄소화에 대한 투자 비중을 조정해야 한다. 이는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것과 연관된다. 동시에 유럽은 EU 차원에서 국방비를 더 많이 지출해야 한다.

유럽은 현재 현상 유지와 더 깊은 통합 중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였다. 유럽은 1986년 단일 시장 창설 합의, 1999년 유로화 도입, 2012년 은행 동맹 결성 등을 계기로 여러 차례 도약했다. 

하지만 드라기 보고서에서 확인된 첨단 기술에 대한 낮은 경쟁력, 높은 에너지 가격, 분열된 방위산업 등은 향후 유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럽 주요국은 유럽 공동체를 설계해 EU의 아버지로 불리는 ① 장 모네(Jean Monnet)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럽 각국 지도자가 최악의 상황을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유럽 통합의 퀀텀점프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드라기 보고서는 위기의 언어를 채택하는 방법으로 모네의 이론을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유럽이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는 드라기의 주장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닐 테다. 일부 유럽 통합의 퀀텀 점프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현재 상황과 다를 수도 있다. 유로화를 만든 들로르 보고서(Delors report, 1996) 이후 1998년 금융 위기가 발생했지만, EU 주요국은 함께 협력하지않았다. 오히려 EU 통합의 암흑기를 맞았거나, 긴밀한 통합을 위한 진전은 10년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모네의 이론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기능주의 유럽 통합 이론도 존재한다. 신기능주의 유럽 통합 이론은 유럽이 한 영역에서 통합을 이뤄낸다면 이 경험이 축적돼 통합이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자본 통제의 철폐를 수반한 단일 시장 탄생은 단일 통화로 전환하라는 압력을 가했고, 이는 다시 은행 동맹을 위한 압력으로 이어졌다. 단일 통화가 도입되면 단일 은행 감독기관이 도입되는 것처럼, 단일 시장이 형성된 후 단일 통화는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정치적으로는 자본 통제의 철폐로 금융 이해관계자의 자금 회수 옵션이 생겨났고, 이들은 이를 지렛대 삼아 단일 통화와 은행 동맹을 추진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단일 시장, 단일 통화라는 EU 주요국의 정치적 결정이 언제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줬다. 최근 독일 정부가 신기능주의의 파급효과를 우려해 이탈리아의 ② 우니크레디트가 독일 코메르츠방크의 지배 지분을 인수하려는 시도에 반발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 통합 압력이 반발도 함께 불러온다는 의미다. 

상호 유리한 정책 거래 있어야 더 깊은 유럽 통합 가능해

일각에서는 유럽 통합이 EU 정부 간 강경한 협상 때문에 추진되기도 하고 방해받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통합은 각국 정부가 통합으로 국방비 지출 등에서 이득을 본다고 생각할 때 국익 일치 판단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일부 정부는 자국 방위산업 도산 등을 우려해 더 깊은 통합에 저항했다. 

각국 정부가 상호 유리한 정책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방법이 될 수도 있다. 1990년대 독일이 통화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대가로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대한 반대를 철회한 것처럼 말이다. 드라기 보고서에서 확인된 상호 연동 문제를 고려할 때, 이렇게 상호 유리한 정책 거래를 확인해 보는 것은 유럽 통합의 성공 가능성을 키우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각국 정부는 자국 통합을 강화할 때 정부 간 더 깊은 통합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연대를 통해 국내 정치 공약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면 위정자들은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53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설립,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을 유럽에 평화적으로 편입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면에서 드라기 보고서는 유럽 통합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드라기 보고서를 통해 유럽 각국 지도자가 유럽 통합을 실행할 준비가 됐는지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Tip

장 모네는 프랑스 경제학자로 1993년 창설된 EU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European Community·EC)를 설계한 인물로 평가된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부터 유럽 각국과 아프리카, 미국, 캐나다 등지를 여행했고, 20대에는 영국에서 거주하는 등 전 세계를 누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30대 때 유엔(UN)의 전신인 국제연맹(LN)에서 근무했던 모네는 그때부터 유럽의 근본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국가 경계를 허문 유럽 국가 건설이 필요하다고 판단, 유럽 국가의 협동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경제계획청장이 된 모네는 유럽 국가가 국가마다 이익을 볼 수있는 정책을 공동으로 만든다면 국가 동맹이 가능할 것으로 확신, 유럽 국가가 단합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모네의 주장은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인 로베트 슈만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슈만 플랜(Schuman Plan·슈만 선언으로 불리기도 함)이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슈만 플랜은 석탄과 철강이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만큼 유럽 국가가 공동단체를 만들어 함께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ECSC 설립의 근거가 된다. ECSC는 전쟁터였던 유럽을 평화 및 협력으로 이끌었고, 이후 유럽 공동체가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이유로모네는 유럽 공동체, EU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 2위 은행인 우니크레디트가 독일 2위은행 코메르츠방크의 지분을 적극적으로 매입하면서 독일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 우니크레디트가 지난 9월 파생 상품 계약을 통해 코메르츠방크 지분을 추가로 매입하면서 독일 정부를 제치고 최대 주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우니크레디트와 이탈리아 정부는 EU 은행 간 협력을 통한 경쟁력 확보를 이유로 코메르츠방크 지분을 매입하고 있지만, 독일 정부는 ‘비우호적 공격’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자 이탈리아 정부는 “말로만 친유럽을 외치는 모습(독일 정부의 반응이)이 아쉽다”고 지적하면서 우니크레디트의 코메르츠방크 지분 매입은 EU 주요국 간 외교 문제로 퍼지고 있다.

배리 아이켄그린 UC 버클리 경제학 교수

정리=윤진우 기자

정리=이연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