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라스트 댄서’ 스틸컷. /사진 SBS콘텐츠허브
‘마오의 라스트 댄서’ 스틸컷. /사진 SBS콘텐츠허브
김규나 -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2년, 리춘신은 중국 전역의 초등학생 중 44명만 선발된 베이징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발레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아이는 이후 7년 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매일 오전 5시 50분부터 하루 16시간씩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엄마가 그리웠을 뿐, 발레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재능도 없는 것 같았다. 평발에다 체력도 약해서 실력이 가장 뒤처지는 학생이었다.

리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두 번째 행운은 훌륭한 스승과의 만남이었다. 첸 선생님의 인정과 격려를 받은 리는 세계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오전 5시부터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그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체력을 길렀다. 친구들이 모두 잠든 밤에는 교실에 촛불을 켜놓고 홀로 턴 연습을 했다.

1등으로 졸업한 그에게 세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1979년, 미국 5대 발레단의 하나인 휴스턴 발레단 예술 감독 벤 스티븐슨이 베이징 예술학교에 특별 강사로 왔다가 리의 재능을 눈여겨본 것이다. 벤은 중국 무용수들이 기계체조 선수처럼 기교는 뛰어나지만, 내면을 표현할 줄 모른다고 평가했다. 리는 달랐다. 그렇게 18세의 리는 중국 공산당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가는 최초의 유학생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자유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한 리는 높은 빌딩, 많은 자동차, 가족이 함께 살던 집보다 더 크고 화려한 방과 따뜻한 물이 펑펑 쏟아지는 욕실에 놀란다. 하지만 그를 더 경악하게 만든 건 한 나라의 수장을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은 발레, 곧 예술이 국가의 명령 수행 도구가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자유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자각이었다.

리는 인생을 걸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를 자문한다.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리는 정치적 사상이나 이념의 하수인으로 사는 대신 춤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를 재능 있는 발레리노로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춤을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살고 싶었다.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직접 보면서, 인간의 몸이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그 아름다움조차 이념을 선전하고 사상을 세뇌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영화에서는 마오의 아내 장칭으로 추정되는 여성 고위 관리가 ‘지젤’ 공연을 보고 나서 “총과 혁명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발레엔 우아함과 부드러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첸 선생님은 사상을의심받고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된다.

우리는 종종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내가 낳아달라고 했어?” 하는 원망 어린 대사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어쩌면 실제로 생각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풍요롭게 만들어줬다며 감사와 복종을 강요하는 나라, 위대한 영웅이라며 가슴에 그 사람의 얼굴을 배지로 만들어 달고 다녀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는 생각해 본 적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려 본 적 있을까?

개인의 운명은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운명이란 개인과 세상이 자전과 공전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인과를 주고받는다. 그래서 운칠기삼(運七技三), 일의 성패는 운이 7이고 재주가 3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어도 시대와 사회가 환영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하지만 리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개방의 물결이 거세게 들이닥치며 시대가 열두 번이 바뀐다 해도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 밖에 있는 두꺼비가 개구리에게 말했대. ‘올라와서 한번 봐. 이 세상은 엄청 넓고 밝아.’ 그 후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는 꿈을 꿨단다.” 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시골집을 떠나 학교에 입학할 때 엄마도 말했다. “멀리멀리 떠나서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 보렴.”

‘마오의 라스트 댄서’ 스틸컷. /사진 SBS콘텐츠허브
‘마오의 라스트 댄서’ 스틸컷. /사진 SBS콘텐츠허브
우물 안 개구리가 높이 뛰어올라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갔다. 좁고 어두운 우물 안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는데 눈부신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리는 자유를 보고 듣고 느낀다. 그 자유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얼마나 갖고 싶은지 가슴 아프게 깨닫는다. 모든걸 다 잃어도 잃고 싶지 않은 단 하나, 그것은 무대에서 마음껏 춤출 수 있는 자유였다.

하지만 우물 안에는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다. 그가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이 위험하다. 중국을 등지려는 그에게 조국은 쐐기를 박는다. “너는 혼자가 될 거야. 조국도 없고 조국의 인민도 없어. 귀국은 절대 허락되지 않을 거야.” 이제 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유를 포기해야 할까? 당과 인민을 위해, 칼과 총을 들고 춤추기 위해 돌아가야 할까? 

‘박쥐’ ‘봄의 제전’ ‘돈키호테’ ‘백조의 호수’ 등 발레 공연의 진수를 일부나마 맛볼 수 있는 ‘마오의 라스트 댄서’는 2009년에 발표된 호주 영화다. 동양인 최초로 휴스턴 발레단 단원이었던 중국 출신 발레리노 리춘신이 2003년에 출간한 동명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다.

영국 노부인과 흑인 운전기사의 우정을 그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의 대담한 복수를 다룬 ‘더블 크라임’ 의 브루스 베레스포드 감독의 작품이다. 세계 10대 우수 발레리노로 선정된 적 있는 리 역은 당시 영국 버밍햄 로열 발레단 수석 무용수였던 츠차오가 맡았다. 청소년기 모습은 리와 츠차오처럼 베이징 예술학교 출신인 청우구어가 연기했다. 

인생은 어쩌면 좁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매일매일의 노력과 몸부림은 아닐까. 자신을 가두고 있는 어제와 오늘이란 우물 안에서 더 높고 더 넓은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당신도 당신의 자유와 의지를 다해 날마다 힘차게 높이뛰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김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