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화장품 그룹 에스티로더컴퍼니즈(Estee Lauder Cosmetics Limited, 이하 에스티로더)에 1조원대에 인수된 K뷰티 브랜드 닥터자르트(Dr.Jart+)의 성장이 둔화하고 있다. K뷰티가 제2 전성기를 맞은 이때, 에스티로더의 ‘아시아 1호 인수 브랜드’로 주목 받던 닥터자르트는 왜 성장이 뒷걸음질 친 걸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닥터자르트를 운영하는 해브앤비는 2024 회계연도(2023년 7월~2024년 6월) 매출이 232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0% 감소했다. 같은 기간 영업 적자는 144억원으로, 이 회사가 최근 10년 사이 영업 적자를 낸 건 처음이다. 당기순이익도 106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닥터자르트는 2004년 건축학도 출신의 이진욱 대표가 설립한 더마 코스메틱(약국 화장품) 브랜드다. BB크림, 세라마이딘, 시카페어 등을 히트시키며 성장했다. 2015년 에스티로더에 지분 33.3%를 매각한 데 이어, 2019년 11월 나머지 지분 전량을 매각해 ‘K뷰티 성공 신화’로 불렸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당시 회사의 기업 가치는 17억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2조원)로, 인수 대금은 약 11억달러(1조3000억원)로 알려졌다.
기업 가치 2조 평가됐는데… 쪼그라드는 매출
하지만 주인이 바뀐 후부턴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에스티로더의 첫 투자가 있던 2015년 닥터자르트의 매출은 863억원에서 2019년 6326억원으로 커졌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84억원에서 1214억원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올해 회계연도 매출은 2329억원으로 5년 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섰다. 에스티로더는 회사를 인수한 후 2021년 7월 해브앤비를 유한회사로 전환하고 사업 연도를 12월 말에서 6월 말로 변경했다.
에스티로더는 닥터자르트를 인수한 이듬해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발생하자 유상 감자를 통해 2208억원의 투자금을 회수하는 등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유상 감자를 진행해 총 4069억원의투자금을 회수했다. 이에 따라 인수 당시 2억원이던 자본금은 1억4035만원으로 줄었다. 유상 감자란 회사가 주식을 유상으로 소각해 자본금을 줄이는 것으로, 기업 규모를 줄일 필요가 있거나 주주가 투자금 회수를 요구할 때 단행한다.
에스티로더는 지난 8월 실적 발표에서 닥터자르트가 예상보다 낮은 성장과 수익성으로 인해 4분기에 4억7100만달러(약 6441억원)의 손상 비용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에스티로더는 크리니크와 조말론, 아베다, 맥(MAC) 등을 운영 중인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 등 아시아 면세 사업 약세로 2024 회계연도 매출이 전년 대비 2% 감소하고, 같은 기간 순이익은 61% 줄었다.
유니레버·로레알이 품은 K뷰티도 역성장
에스티로더가 닥터자르트를 인수한 시기는 중국에서 한국의 마스크팩과 BB크림 등이 인기를 끌며 K뷰티 열풍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다. 럭셔리·색조 화장품 중심의 포트 폴리오를 갖고 있던 에스티로더는 중저가 더마 코스메틱 브랜드인 닥터자르트를 통한아시아 시장 진출을 구상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닥터자르트의 2018년 국내 면세 판매액은 2409억원으로 샤넬, 구찌, 루이비통 등 명품보다 돈을 더 벌었다.
비슷한 시기 영국 생활용품 제조사인 유니레버가 AHC 운영사 카버코리아를 3조원에, 프랑스 로레알그룹이 쓰리컨셉아이즈(3CE) 운영사 스타일난다를 6000억원에 인수한 이유도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국 현지에서 ‘애국 소비’ 열풍으로 자국 화장품이 인기를 끌고 여행 소매(면세) 부문 매출이 감소하면서 이들 브랜드 실적은 악화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대중국 화장품 수출은 2021년 49억달러(약 6조7012억원)에서 지난해 28억달러(약 3조8293억원)로 쪼그라들었다.
스타일난다는 로레알그룹에 인수된 이듬해인 2019년 매출 2695억원, 영업이익이 618억원이었지만,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17%, 36% 감소했다.
2017년 카버코리아를 인수한 유니레버도 이듬해 매출 6580억원, 영업이익 1624억원으로 고점을 찍은 후 하락세를 이어 가고 있다. 작년 매출(3147억원)은 2018년과 비교해 반 토막이 났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628억원)은 61%가 줄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이들 기업은 희망퇴직(카버코리아)을 시행하거나, 오프라인 매장을 축소하는(스타일난다)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非 중국 시장으로 판 다시 짠다… 美·日 확대
잘나가던 K뷰티 브랜드의 실적이 일제히 감소한 이유는 △브랜드 파워 약화 △시들해진 중국 내 K뷰티 인기 △인수 기업의 경영 능력 부족 등이 꼽힌다.
3CE의 경우 ‘센 언니’ 콘셉트를 앞세워 색조 화장품 전문 브랜드로 성장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로 자연스러운 화장법이 유행하고 현지 화장품 경쟁력이 높아지자, 위상이 저하됐다. 업계에서 BB크림을 처음 출시한 닥터자르트와 아이크림을 앞세운 AHC 역시 성장을 이어 갈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해 입지가 줄었다는 평가다.
주력 시장이던 중국에서 K뷰티의 인기가 시들해진 점도 한몫했다. 인수된 브랜드 모두 중저가 브랜드로, 모방이 손쉬운 점이 약점으로 지적됐는데, 비슷한 콘셉트를 내세운 중국 로컬 브랜드가 부상하면서 선두 자리를 뺏겼다.
인수 기업의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시각도 있다. 김소희 전 대표가 20대에 동대문 의류를 판매하며 성장한 스타일난다, 건축학도 대표가 피부과 의사와 함께 BB크림을 만든 닥터자르트 등이 글로벌 기업에 넘어간 후 정체성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화장품 업계 한 관계자는 “닥터자르트, 3CE 등은 화장품 시장에서 개성이 강한 브랜드로 평가됐으나, 글로벌 기업으로 주인이 바뀐 후 평범한 브랜드가 됐다”고 말했다.
최근 닥터자르트는 다른 K뷰티 브랜드처럼 비중국 시장으로 판로를 확대하는 모양새다.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 화장품의 관심이 커지는 걸 고려해 지난 7월 미국의 아마존 프리미엄 뷰티 스토어에 입점하고, 앳코스메, 마쓰모토키요시 등 일본 드럭스토어에 재진출했다. 지난해엔 K팝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을 글로벌 앰배서더(홍보대사)로 선정해 인지도 제고에 나섰다.
에스티로더에 따르면, 닥터자르트는 지난해 EMEA(유럽·중동·아프리카) 시장에서 매출이 두 배 이상 증가했고, 미주 시장에서도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회사 측은 “여행 소매 채널에서 (닥터자르트를) 철수하고 중국 본토와 서구 시장을 포함한 수익성이 더 높은 다른 사업 분야에 직접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