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카세스(Ricardo Cases)의 ‘TOT’ 표지. / 김진영
리카르도 카세스(Ricardo Cases)의 ‘TOT’ 표지. / 김진영

사진은 흔히 시간에 기반한 매체로 인식된다. 카메라는 눈과는 다르게 시간을 멈추고, 삶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특정 순간을 분리해 내, 그 순간을 프레임 안에 담아 보여준다. 시간의 관점에서 사진을 생각해 보는 것은 사진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진과 시간의 관계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표현 중 하나는 ‘결정적 순간’일 것이다. 결정적 순간은 프랑스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을 통해 대중화된 개념으로, 장면의 요소가 완벽하게 정렬되는 순간을 뜻한다. 브레송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진은 단 몇 초 만에 사건의 중요성과 그 사건에 적절한 표현을 부여하는 정확한 형태의 구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이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사건이나 주제의 본질을 예술적이고 서사적으로 담아내는 이미지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짧은 순간에 구도, 빛, 움직임 등이 결합돼 장면의 절정을 포착했을 때, 한 장의 사진은 독립적이고 강렬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같은 관점은 가장 훌륭한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가장 뛰어난 하나의 순간과 그보다 질적으로 뛰어나지 않은 여러 순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이라는 개념은 사진을 평가하는 잣대로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진가는 사진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에 맞서, 명확한 구성이나 클라이맥스 없이 모호하고 일상적인 상태를 포착하는 ‘비결정적 순간’을 추구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사진이 될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어떤 것도 의미로 기능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말이다.

김진영 -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스페인 작가 리카르도 카세스(Ricardo Cases)의 ‘TOT’ 역시 작가가 추구한 비결정적 순간을 보여준다. 이 책은 스페인 발렌시아에 있는 작가의 집과 15㎞ 떨어진 딸의 학교를 오가는 일상의 여정 속에서 관찰한 장면을 담은 책이다.

카세스는 딸을 차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고, 딸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반복되는 일상 중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일상의 리듬 속에서 그는 다양한 대상을 관찰한다. 우선 이 여정이 자동차로 이뤄지기에 도로나 고속도로에서 관찰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운전하며 마주한 다른 자동차, 버스, 트럭 그리고 머리 위나 창밖을 스쳐 가는 도로 표지판, 주유나 주차하는 사람, 도로변의 잡초를 베는 작업자 등이다. 차 안에서 밖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카세스는 여러 장소에 들르고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지나는 길에 있는 오렌지 농장의 풍경과 사람을 찍기도 하고, 밭농사를 짓기 위해 소를 모는 농부를 만나기도 하며, 거리를 오가며 우연히 만난 사람의 모습도 포착한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에는 여러 사물도 있다. 길가의 쓰레기부터 거리에 핀 꽃, 벽화나 낙서 등 그의 주의를 끄는 대상을 자유롭게 포착한다.

이러한 사진 가운데 반복해 등장하는 것은 바로 딸의 모습이다. 카시트에 앉아 있는 모습, 배낭을 메고 학교로 달려가는 모습, 인형을 들고 노는 모습, 즐거운 얼굴을 하거나 때로는 장거리 운전에 지루해하는 모습 등 딸의 이미지는 책 전반에 걸쳐 배치돼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딸의 사진은 책에 흥미로운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사진가로서 삶과 아버지로서 삶이 연결돼 있음이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일상을 관찰한 사진과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는 두 가지 축이 교차하며 전개된다는 독특함과 재미가 있다.

책에는 스페인 발렌시아에 있는 작가의 집과 학교를 오가는 딸의 일상에서 관찰한 장면이 담겼다. 거리를 오가며 우연히 만난 사람, 사물의 사진과 딸의 사진이 반복해 등장한다. 딸의 이미지는 책 전반에 걸쳐 배치돼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책에 흥미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 사진가로서 삶과 아버지로서 삶이 연결돼 있음이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 김진영
책에는 스페인 발렌시아에 있는 작가의 집과 학교를 오가는 딸의 일상에서 관찰한 장면이 담겼다. 거리를 오가며 우연히 만난 사람, 사물의 사진과 딸의 사진이 반복해 등장한다. 딸의 이미지는 책 전반에 걸쳐 배치돼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책에 흥미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 사진가로서 삶과 아버지로서 삶이 연결돼 있음이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 김진영

카세스의 사진은 어떤 큰 사건을 담거나완벽한 구도를 보여주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중간에 있는, 흐름 속에 있는, 혹은 일상 속의 평범한 순간을 담는다. 이러한 사진은 완벽한 구도나 타이밍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면을 표현한다. 장면의 미묘함, 감정, 쉽게 간과될 수 있는 세부 요소를 드러내는 사진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책에는 2019년 1월부터 6월까지 촬영한 총 6개월분의 1655개 이미지가 수록돼 있다. 책은 한 페이지에 한 장의 사진을 담는 고전적인 편집 대신 그리드를 활용해 편집됐다. 그리드란 가로와 세로를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이 되게 짠 형식이다. 각 페이지는 사진을 넣을 수 있는 12개의 공간이 있는데, 모든 칸이 개별 이미지로 채워지면 페이지에는 12개의 사진이 있게 된다. 사진 한 장이 2개, 4개, 6개, 9개, 12개 칸에 걸쳐 있게 되면 페이지에는 각각 고유의 리듬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그리드 구조를 유연하게 사용함으로써 책 전반에 걸쳐 경쾌한 느낌이 만들어진다. 또한 그리드를 이용해 사진을 배치한 결과, 한 장의 사진은 한 장면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가진 ‘결정적’ 사진이 아니라, 한 장면을 포착한 여러 ‘비결정적’ 사진 가운데 하나가 된다. 책의 표지 역시 책의 그리드 형식을 반영해 디자인했다.

카세스의 사진은 비결정적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 가진 명확성과는 반대되지만, 여전히 사진 속에서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큰 일화가 담겨 있기보다는 카세스가 바라본 일상과 그의 의식 흐름이 독자에게 전달되고, 불확실성과 연속적인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관객이 장면 속에서 자신만의 해석이나 연결을 찾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6개월에 걸친 일상의 여정을 일종의 시각적 일기처럼 만든 이 책은 우리에게 매일 지나가 버리는 순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평소에는 무심히 흘려보냈을 장면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한다. 

김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