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필리핀 마닐라의 부촌인 ‘마카티’ 에 있는 ‘랜드마크 슈퍼마켓’ 매장. 마트 내 매대 하나는 온통 한국 제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신라면, 진라면 등 유명한 라면부터 알로에·토마토 주스 등 한국에서 수입한 음료로 진열장이 꽉 찼다. 총 6개의 지점이 있는 랜드마크 슈퍼마켓은 필리핀 현지에선 상대적으로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매장이다.
한국 제품 매대의 메인 상품은 단연 라면이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수출한 라면 수출액은 3690만달러로, 전년 대비 약 17.8%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대(對)필리핀 라면 수출액은 2400만달러로, 작년 상반기보다 32.9%나 늘었다.
컵 떡볶이 같은 간편 식품과 김, 쌈장도 마트의 인기 제품이다. 매대에선 초고추장, 불고기 양념, 잡채 양념 등 한식용 소스류의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필리핀에 파견된 청년해외개척단(AFLO) 단원인 이은채(23)씨는 “필리핀 사람은 매운맛보다는 궁중떡볶이나 잡채처럼 간장 베이스의 달콤한 소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면서 “식품 박람회에서도 분말 소스류를 찾는 필리핀 바이어가 많았다”고 말했다. ‘단지 통 우유’로 익숙한 ‘바나나맛 우유’도 보였다. 다만 기존의 ‘꿀단지’ 형태가 아니었다. 수출에 용이하게 네모난 갑에 담겨 있었다. 배송 기간을 고려해 장기간 유통이 가능한 멸균우유 형태로 만든 것도 특징이다.
채소 코너에선 태극기 스티커가 붙은 한국산 파프리카가 눈에 띄었다. 한국산 파프리카는 개당 약 200페소(약 4700원)에 판매 중이었다. 현지에서 생산한 파프리카(약 100페소·2350원)의 두 배 가격이다. 한국산 파프리카가 필리핀에 수출되기 시작한 건 지난 7월부터다. 2014년 한·필리핀 정부 간 검역 협상 타결 이후 작년 8월에서야 검역 조건이 완화됐고, 약 1년여 만에 필리핀행 비행기에 파프리카를 실을 수 있게 됐다. 필리핀으로 수출되는 파프리카는 강원 평창에 소재한 농업회사법인에서 생산한 국산 신품종 파프리카다. 가격은 비싸지만, 과육이 단단하고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프리카 유통사관계자는 “마트에 납품할 때마다 한국산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태극기 스티커를 꼭 붙여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일반 편의점에서도 K푸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필리핀에 180개 지점을 두고 있는 일본계 편의점 체인인 ‘로손’은 전 매장에서 한국산 컵라면을 판매한다. 로손에선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어묵 판매대도 운영 중인데, 판매하는 어묵은 일본산이 아닌 한국산이라고 한다. 필리핀의 한 식품 수입 기업 관계자는 “일본산보다 한국산 어묵을 필리핀인이 더 선호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로손에서 해외 식품을 수입하는 일을 하는 마티사 테니니오 상품 기획 매니저는 “라면, 김치, 김, 어묵, 소주 등의 한국 식품이 많이 팔리고 있다”면서 “필리핀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젊은 세대가 한국 문화와 한식에 관심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로손에서판매 중인 도시락에 불고기 등 다양한 한식 메뉴를 접목하고 있다”면서 “현재 판매하는 도시락 세 개 중 한 개는 한국풍 메뉴를 담고 있다. 한국에서 판매 중인 달걀이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를 도시락 메뉴로 검토 중”이라고 했다.
필리핀에 부는 한류 붐을 타고 K푸드의 수출 길은 점점 넓어지는 추세다. 올해 8월까지 대필리핀 한국 농식품 수출액은 2억1000만달러(약 2882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18.4% 증가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aT는 필리핀을 K푸드 유망 시장으로 보고 있다. aT 관계자는 “필리핀은 인구 1억1000만 명에 달하는 시장”이라면서 “특히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한식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식 수출에 있어 유망한 시장”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필리핀 외교 관계 격상도 K푸드 수출 확대에 기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10월 7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 전 가진 필리핀 유력 일간지 ‘필리핀스타’와 인터뷰에서 “양국 관계 발전의 중심축이 돼 온 무역과 투자를 한층 더 확대하길 희망한다”며 “한·필리핀 FTA가 발효되면, 무역과 투자가 획기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제작 지원: 2024년 FTA 이행 지원 교육 홍보 사업]
“OTT 타고 퍼지는 K푸드, 고품질로 팬덤 형성”
과거 필리핀 국민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한류(韓流) 문화에 대해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인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1990년대 말 이후 필리핀으로 간 한국인 관광객과 어학 연수생의 부정적인 행태가 지적된 적이 많은 데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불법 이민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리핀 내 한류 확산은 다른 아세안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지연됐다.
반전을 만든 것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였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시기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며 OTT 시청 인구가 늘었고, 한국 드라마가 필리핀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류에 대한 관심은 이제 한식과 K푸드로 향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75년 업력의 식품 수입 회사인 후아산을 경영하는 데이비슨 고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드라마에서 나온 한국 식품에 관심을 보이는 필리핀인이 많아졌다. 드라마 감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드라마에 나온 문화를 경험하고 소비하려는 욕구가 그만큼 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고 CEO는 “필리핀 사람이 제일 선호하는 제품은 불닭볶음면과 같은 라면 제품”이라며 “원래 필리핀 사람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최근 드라마와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매운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필리핀 내 최대 한국 식품 수입 업체인 페어그라운드의 박가혜 대표 역시 K푸드 유행의 일등 공신으로 ‘넷플릭스’를 꼽았다. 페어그라운드는 1년에 약 3000만달러(약 412억원)어치의 한국 제품을 수입한다. 연간 매출은 800억원 규모다. 박 대표는 현지에서 한식을 즐기는 방식도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김치, 비빔밥, 불고기 같은 음식 자체가 인기였다면, 이제는 여러 반찬을 놓고 먹는 ‘반찬 문화’ ‘치맥 문화’ ‘분식 문화’ 등 음식 문화를 즐기는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K팝 가수가 좋아하는 메뉴에만 관심을 보였다면,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 등 콘텐츠에서 나온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진 측면이 있다” 고 했다.
두 대표는 K푸드가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배경으로 ‘고품질’을 꼽았다. 박 대표는 “한국 식품의 강점은 가격 대비 품질이 좋다는 점”이라며 “현지 식품과 비교하면 비싸지만,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가격대에서는 품질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반응이 빠른 품목으로 라면과 아이스크림을 꼽았다. 박 대표는 “라면은 현재 판매량이 연평균 20%씩 증가하고 있다. 수출 증가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면서 “‘메로나’와 ‘붕어싸만코’ 등 한국 빙과류의 성장세도 꾸준하다”고 했다.
고 CEO는 “한국 농산물을 수입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라며 “지난 7월부터 파프리카 판매를 시작했는데, 재구매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품질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딸기와 포도 등 한국산 농산물을 더 수입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며 “좋은 품질이라면 충분히 가격을 지불하겠다는 소비자가 필리핀에도 많다”고 했다.